오크 파크(헤밍웨이의 생가, 라이트의 작업장, 알 카포네의 은둔처)
다음날
금석 선생은 좋은 차를 갖고 일찍 호텔로 찾아주었다.
내가
시카고 시내 구경은 다시 못해도 근교의 헤밍웨이 생가가 있는 오크 파크는 꼭
보아야겠다고 해서 일찍 찾아준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금석 선생의 자택은 시카고 메트로폴리탄 에어리어에서 꽤 먼,
교외의 좋은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프론트에는 어제 보았던 히스페닉 계의 아가씨 둘이서 서툰 영어로 서비스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금석님은 일찍 와서 그녀들로부터 오크 파크로 가는
길의 정보를 좀 얻고자 하였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듯했다.
하여간 금석 선생의 승용차는 우리를 태우고 스무드하게 출발하였다.
차는 남으로 계속 내려갔는데 교외 지대에는 허름한 집들이 많이 나타나서 미국의
현실을 있는 데로 들어내고 있었다.
프론트 데스크 아가씨들의 서툰 안내 말대로 한 시간 반경이나 남으로 내려오다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주유소에 들러 알아보니 방향이 정반대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오크 론(Oak Lawn)이라는 곳이었다.
그제야 나도 책에서 읽은 ”시카고 북쪽 근교의 오크파크“ 어쩌고 하던 구절이 생각
났으나 ”잘 난 기억“일 뿐이었다.
우리는 방향을 정반대로 하여 다시 달렸다.
역시 중간지대에는 허름한 집들을 거친 다음 마침내 부유한 교외지대가 나타났으니
바로 “오크 파크”였다.
거리 곳곳의 게시판에는 “historic district”라는 표지가 요란해서 과연 헤밍웨이의
고향답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ed Wright)"의
건축물들을 염두에 둔 지구지정인 것이었다.
문학, 혹은 인문학 홀대는 시간과 장소 가림이 없는가---.
어쨌거나 내가 찾는 곳은 헤밍웨이의 생가와 그의 박물관이었다.
내가 “한국 헤밍웨이 학회”의 회장을 맡았을 때 오크파크에 있는 “미국 헤밍웨이 재단”
에서 출판물 기증을 요청하여서 마침 여기를 방문하는 한국의 학자들 편에 우리나라의
여러 연구물과 번역서들을 보낸바 있었다.
물론 내가 쓰거나 번역한 졸문들도 여러 권 포함되어 있었다.
잘하면 오늘 그 책자들도 다시 구경할 참이었다.
헤밍웨이 박물관은 웅장한 건물이었다.
애초에는 종교적 건물로 축조되어 사용되어 온 것을 헤밍웨이 재단에서 구입한
모양이었다.
정말 쾌거였다고 할만 했다.
주로 이 동네 사람들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개관 시간이 오전 11시여서 부자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개관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생각해 보니 그나마 아가씨들의 서툰 안내로 지연된 시간이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어쨌거나 기다리는 시간 자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헤밍웨이의
유년시절을 짐작해 보는 재미가 또한 있었다.
헤밍웨이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교회 성가대 지휘자 및 음악 학원을 운영한 어머니
사이에서 매우 극단적인 가치관을 오락가락하며 성장하였다.
외과의사인 아버지는 자연 속의 일탈을 즐겨서 사냥과 낚시광이었고 어머니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교양인이었다.
아버지는 그 때 막 불어재친 플로리다의 부동산 투기 붐에 들어갔다가, 말하자면
상투를 잡고 빈털터리가 되는데 어머니는 친정 집의 유산과 음악 학원 운영으로 거금을
모은다.
새로 지은 집도 어머니의 재력이었고 아버지가 모은 인디언 화살촉이나 물고기 표본
같은 것은 새집으로 오기 전에 모두 불에 태워 버려진다.
아버지의 자살은 이런 분위기에다가 헤밍웨이 가문의 오랜 유전적 기질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스타로 꽤 성공한 헤밍웨이의 손녀딸 “마고 헤밍웨이”가 수년전에 발가 벗은
의문의 사체로 발견된 것도 이런 가계의 기전과 관련이 있지나 않은가 추측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박물관의 문이 열렸다.
헤밍웨이 박물관에는 문자 그대로 작가의 모든 창조적 산물들이 꼼꼼히 정리되어 전시
되어 있었다.
내가 책에서 보았던 친숙한 타자기도 거기에 있었고 장총과 낚싯대도 있었다.
나도 타자기를 몇 자 두드려 보고 화살도 만져보는 인상적인 경험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 영화화 되었는데 그 영상물들도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행동반경이 넓었던 수많은 그의 유품들이 수집되어 있는 것이 경이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 각국에서 발행된 헤밍웨이 관련 서적들은 처음 이 곳에 전시
되었다가 그 분량이 너무 많아지자 별도의 수장고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희망자에 한해서는 대출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확인으로 만족할 따름이었다.
헤밍웨이의 생가는 두 블록쯤 떨어져 있었는데 개관 시간이 오후 1시였다.
여기까지 와서 생가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우리는 다시 길 가와 서점 가와 가게를 서성대며 1시 개관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이날의
첫 손님이 되었다.
박물관과 생가는 모두 묶어서 개인당 7불의 관람료를 내야했고 관리와 안내는 모두
나이든 이 지역의 자원봉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맡고 있었다.
생가의 모습이나 전시품은 그에 관한 연구서와 화보 등, 나에게는 여러 경로로 친숙한
것들이었다.
특히 작가의 조부모와 부모의 방과 서재와 식당 등이 인상적이었고 외과의사인 아버지의 진료실과 수술실을 구경한 것도 재미있는 체험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1층을 구경하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인근에 있는 헤밍웨이
식당(Hemingway Bistro)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와 2층까지 구경을 마쳤다.
“헤밍웨이 식당”은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풍경을 많이 모방한 유럽 스타일이어서 우리가 이태리식이냐고 물었더니 웨이터가 정중하고도 자랑스럽게 프랑스식 식당이라고 확인을 해 주었다.
생가의 할머니 말씀대로 밥값은 비쌌으나 맛은 별로였다.
다시 생가로 돌아갔더니 아까 설명을 해주던 백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간에서 반기며 이층으로 안내하여 조부모의 거처, 아버지 헤밍웨이의 진료와
수술실, 헤밍웨이 형제자매들의 방과 여러 귀중한 유물들의 전시실들을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헤밍웨이의 생가 구경을 마치고 보니 가족들이 다녔던 교회 구경을 꼭하고 싶었다.
“제1 조합교회”라고 번역되는 “the First Congregational Church"는 이 집안 가족들의
오랜 신앙생활의 터전이었는데 생가로부터는 한 20분 거리에 있었다.
교단의 이름도 오늘날은 큰 두 교파가 통합을 하여서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칭
되었는데 교회사적인 자세한 내용은 내 지식의 밖이었다.
그 교회로 가려고 모퉁이를 돌다보니 이차대전 참전 용사들과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어서 노인과 아이들이 한가롭게 쉬거나 놀고 있었다.
우리가 길가는 사람에게 연합교회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데, 지적으로 생긴 그 행인이
조금 떨어진 곳의 웅장한 교회를 가리키며, 구경이 끝나면 그 앞 길 건너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세운 건축물들도 구경하라고 하였다.
맙소사, 이 곳이 바로 20세기 초, 미국 건축의 아버지 Frank Lloyed Wright의 생가와
그가 건축한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있는 바로 그 오크파크란 말인가.
그는 또 시카고 대화재 이후의 재개발에 적극 참여하여 그 진가를 나타내기도 하였지.
또한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도 이 건축가의 작품이 아니던가.
저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지금 현재 일대 보수작업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을
얼마전에 읽었는데 전시와 관람은 그대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보수가 끝나도 전혀 보수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는 내용도 읽은 기억이
있다.
보석 같은 정보를 손에 넣었으나 헤밍웨이 박물관과 생가, 그리고 식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우리에게 오크 파크에서 더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또 오늘의 주요 방문 목적은 헤밍웨이 쪽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저녁에는 일 많은 내 동생을 일단 호텔 비즈니스 센터로 안내해주고
우리는 금석 선생의 댁을 방문하는 길에 “우래옥”에서 저녁도 먹을 예정이 있었다.
명계웅 교수와의 만남도 그 식당에서 이루어질 일이었다.
(시카고 화재 후의 재건설, 맨해튼의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남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업장이 역사적 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는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우리는 발길을 재촉하여 로이드의 건축물 하나와 그의 작업실을 일별하였다.
하긴 그의 작업실은 내부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서두는 발길에 나중 알고 보니 “알 카포네”의 집 탐방도 빠졌고 타잔의 작가
“버로우즈”의 집을 찾을 일도 흘렸다.
하긴 이 부분들은 동네 사람들도 잘 몰랐더라는 정황이 위로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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