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직지사 사명각(直指寺 四溟閣)과 벽화이야기

보리숭이 2014. 7. 31. 18:34

 

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 경내에는 사명각이 있다. 직지사가 사명대사가 출가한 절이기 때문이다.

사명각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호국대성 유정(護國大聖 惟政,1544~1610) 사명대사의 영탱을 봉안하여 대사의 유덕을 기리는 건물로서 조선 정조 11년(1787)에 창건되었다. 현 건물은 수차례 중수를 거쳐 녹원 화상에 의하여 석조축대를 신축하고 건물은 해체 복원(1975.2.24~1975.12.30)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대통령의 친필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쓴 것이 특이하다.

 

대사의 속성은 임씨 자는 이환(離幻)이며, 법명은 유정 법호는 사명 또는 송운(松雲)이다. 1544년 10월 17일에 경남 밀양의 무안면 고나리에서 태어나 15세에는 황악산 아래 유촌 황여헌으로부터 유학을 수학하더니 곧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하여 주지 신묵화상(信黙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18세가 되는 명종 16년(1561)에는 선과에 합격하고, 30세인 선조 6년(1573)에는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49세가 되는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적의 진중에 여러 차례 드나들며 왜적을 설득하여 백성들의 화를 면하게 하더니 선조 37년(1604)에는 61세의 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억류되었던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므로 선조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삼아 어마를 하사하는 등 대우가 극진하였다.

광해군 2년(1610) 67세를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하니 시호를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사명각 내부의 사명대사 영탱

사명각 둘레에 있는 벽화는 사명대사에 관한 대표적인 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묵대사가 사명당을 만나는 날,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용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

그 자리에 가보니 한 소년이 자고 있었다. 신묵대사는 그 소년을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사명 대사이다.

당시 은행나무는 1800년 만세루가 불타면서 같이 타버렸고,

현재 천왕문 앞에 있는 돌은 소년 사명당이 낮잠을 자던 돌이라고 전한다.

사명대사 일행이 11월 초순 일본에 도착하자 덕천가강은 약 500명의 영접단을 보내어 사명대사 일행을 모시니 그 규모가 굉장하였다.

  일본인들은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훌륭한 스님이 온다 하여 가마가 지날 때 마다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두 손을 모으며 합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덕천가강은 회담이전에 사명대사의 기세를 꺾어 놓을 마음으로
몇 가지 도술의 힘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사절단 일행이 경도 가까이 오자 30리에서부터 중간 중간에 장막을 치고 그 앞에 병풍을 둘러치고 병풍에는 일본 사람이 지은 시를 써 놓았다.

대사는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미리 보이는 시를 모두 외워 두었다.

  경도에 도착하니 일본에서 가장 학문이 뛰어난 두 사람의 중이  "우리 일본의 시를 평해 주십시요."  하는 것이었다.

  대사는 길가에 세운 병풍의 시를 한 수 두 수 외워가며
그 형식과 내용의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평 하니, 깜짝 놀라며 귀신같은 재주라고 감탄하였다.

  또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는데 수백 수의 시를 다 외우니,
그만 신승이라고 감탄하고 말았으며 이 사실을 덕천가강에게 보고하니 가강도 놀라며 좀 더 시험해 볼 궁리를 하였다.

  사명대사를 방바닥이 철판으로 된 조그만 방에 모시는 것이었다.
  " 아하, 이 놈들이 무슨 딴 흉계를 꾸미는 것이구나."  마음속으로만 짐작하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 후 방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이번에는 아무리 도가 높아도 견디지 못하겠지."
  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사명대사는 품고 온 과일 세 개를 꺼내어 하나는 자리 밑에 깔고, 
두 개는 양손에 갈라 쥐고 서리 상(霜)자와 눈 설(雪)자를 네 벽에 써 붙이고  정신을 통일하여 자기만 알고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며 앉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본인들이 문을 열고 보니 사명대사는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방바닥도 싸늘하였다.

  사명대사는 놀라는 왜인들을 보고  " 너희 나라가 우리 나라보다 따뜻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 밤에 어찌 그리고 추우냐? 사람 대접을 어찌 그렇게 하느냐?"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