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가 막바지로 접어든 1960년 2월 28일 민주당의 대구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당국은 일요일인데도 학생 전원의 등교를 명했다. 이에 경북고교 학생들이 ‘학생인원 보호하라!’고 시위에 나서자, 삽시간에 데모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자유당은 학생과 민중들의 시위 속에서도 3․15 부정선거를 강행, 마침내 선거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데모가 벌어졌다. 이것이 4월 혁명의 불씨가 되어 전국을 흔들어 놓았다. 4월 11일, 김주열의 처참하게 살해된 사체가 마산 앞 바다에 떠오르자 분노의 불길은 극에 달했다.
다음 일자 조간엔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글이 전 김천경찰서장 최창수의 글이 게재되었는데, 대문짝만한 일면 특호 활자는 불난데 기름을 뿌렸다. 18년 폭정의 소산인 양 안하무인격인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몽둥이로 변한 인상을 주었다. (후문에 의하면 당시 민중에 편승한 언론이 자주적인 기사로 과장 보도했다는 설도 있다.)
이 무렵 야당 도시 김천의 공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폭풍우 전의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어이 일은 벌어진 것이다. 1,500명 젊은 송설의 사자들이 노도와 같이 교문 밖을 쏟아져 나갔고, 군중이 합세하여 세력은 더욱 커졌다.
‘썩은 정치 물러가라’ 삽시간에 온 시내는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수천의 학생과 시민이 경찰서에서 대항 투석전을 벌였다. 참고 참은 울분과 그동안 억눌렸던 약자의 서러움 같은 것을 학생 시민들은 저마다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이리하여 유리창은 모조리 파괴되고 경찰은 연신 공포를 쏘아댔다. 그런데 아아, 이때 본교 고 3년생 이연하 군이 비명과 함께 자리에 쓰러졌다. 유탄에 맞은 것이다. 이군은 즉시 병원에 옮겨졌지만 그땐 벌써 숨이 끊어진 뒤였다. 18세 꽃다운 청춘은 어이 없이 가 버렸다. 그의 빈자리에 켜진 촛불을 보고 당시 학우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지금 우리는 고인의 넋을 위로할 아무 말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서럽다. 격분한 군중들은 닥치는 대로 집기를 부수고… 일부 군중들은 자유당, 국회의원집에 밀어 닥쳐 수라장을 만들었다. 같은 날 중앙파출소도 크게 파괴되었다.
이렇듯 전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오래가질 않았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함께 민권의 승리로 학생 의거는 영원히 역사에 빛나는 장으로 남게 되었다.
4․19의 역사적 사실이 던진 교훈은 건강한 ‘민주사회의 건설’이었다. 그 거룩한 이념구현 아래 죽어간 꽃다운 학생들 중, 동문인 이연하 군이 있었다. 송설인 모두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이연하(송설26회), 국립 4.19 민주묘지 1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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