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역사관

[스크랩] 송설당가계와 삶

보리숭이 2012. 3. 23. 16:51
1. 송설당의 가계

1855년(철종 6) 8월 29일 金山郡 郡內面 文山里(지금의 김천시 문당동)에서 아버지 崔昌煥과 어머니 鄭玉瓊 사이에서 無男三女의 장녀로 출생.

본관은 和順이고, 南冥 曺植 수제자인 守愚堂 崔永慶의 후손이다.
즉, 崔永慶→崔弘緖→崔誼→崔敬逸→崔承立→崔世浩로 이어진다. 6대조인 崔世浩(1685∼1729)는 禮曹佐郞, 5대조 崔重寔(1703∼1750)은 折衝將軍 行龍 衛副護軍, 고조인 崔天成(1729∼1776)은 咸興中軍을 지냈다.

증조부 崔鳳寬(1758∼1812)은 副護軍이었는데 그의 외가인 江陵劉氏가 洪景來의 난(1811)에 가담하였고, 그 또한 평안도 선천군이 함락되었을 때 무관으로서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하여 옥사하였고, 그의 아들 崔翔文(1785∼1847) 등 4형제는 전라도 古阜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최상문의 아들인 崔昌煥(1827∼1886)은 고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는데, 그의 부인 延安金氏(1827∼1844)가 죽은 뒤, 또 21세(1847)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자, 1850년에 金山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그래서 이로부터 5년 뒤에 부인 鄭玉瓊(본관:慶州, 鄭在成의 女)으로부터 첫딸 송설당이 태어났다.

송설당에게는 손아래 누이가 두 명 있었다. 둘째는 文鎭源(본관:南平)에게 출가하여 아들 文孝永과 文友永을 두었고, 셋째는 曺宇永(본관:昌寧)에게 출가하여 아들 曺傑承(曺相傑?)을 두었다.
그리고 남자후손이 없는 관계로 할아버지 최상문의 동생인 崔학文의 손자(즉 최학문의 아들인 崔昌福의 아들)인 光翼을 들여 系子로 삼았다.

* 참고 : 이후 崔光翼→崔奭烈(초명 錫烈, 일명 崔錫台)→崔在鶴(무남4녀, 在文의 장자 鎬가 계자)·崔在德(2남3녀)·崔在文(3남 1녀 중 장자 鎬 出系함)
송설당의 아버지 최창환은 書堂 訓長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늘 선조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가문의 빛내야 한다고 송설당에게 강조하였다.

2. 송설당의 삶

1855. 8. 29. 출생
1860∼1870. 부친으로부터 한학과 한글을 수학
1882. 3. 10. 再從弟 崔光翼을 들여 대를 잇게 함.
1886. 6. 19. 부친 최창한이 별세하여 咸平 新光面 三泉洞까지 운구하여 장례 지냄

1894(40세). 상경하여 누룩골(麴洞 현 무교동)에 거처하며 불교에 귀의.
1897. 嚴妃와 가까워졌고 황태자 이은(李垠, 후에 영친왕으로 기록) 탄생하자 입궐하여 保姆가 됨.
1901. 11. 고종황제로부터 沒籍의 復權이 내려 89년만에 선조의 명예 회복.
1908. 5. 親墓를 修築立石하고 花樹會를 열어, 원근 宗親에게 田畓과 學 資金을 줌. 1911∼1912 金海에 500石직이 토지 매입, 전국 30 개 본사 사찰에 많은 시주 함.
1912. 8. 경성 武橋洞(현 무교동 코오롱빌딩 자리)에 저택을 건립하고 松雪堂이라 현액 - 송설당은 처음에는 堂號였는데, 뒤에는 자신의 號, 나아가서는 이름으로 굳어짐.

1914(60세) 金山 校洞 주민 구휼에 벼 50석을 희사하여 소작인들에게 慈母로 추앙 받음
1915. 京城婦人會에 거금을 기부하고 日本赤十字社 특별회원이 됨.
1917(63세) 어머니 鄭氏 별세. 어머니가 "淨財를 育英에 써라"고 유훈. 金泉公立普通學敎에 기부금, 金陵幼稚園·金陵學園 등에 유지비 기부
1919. 김천에 古阜齋室 "貞傑齋"를 지음 (건축 당시 卍海 韓龍雲의 자문을 받음, 6·25전쟁시 소실)

1920(66세) 김산군 금릉면 부곡동 고성산록에 假墓를 설치함.
1922. 12. 1. "松雪堂文集" 3권 3책을 발간하여 세계 각국 도서관에 보냄. 독립운동가 愛山 李仁과의 대담에서 육영사업에 뜻이 있음을 밝힘
1926.∼1929. "國恩에 보답코자 사회사업에 투자" 재산을 풀어 고아원·유치원 설립 (동아일보 1926.11.16. 관련 기사), "최송설당여사 금릉학원·금릉유치원에 기부"(동아일보 1929.1.18자 관련 기사). 학교 설립비로 저축해온 재산을 법적 寄附採納하기 위해 李漢騏에게 정리의뢰

1930(76세) 2. 22. 송설당과 이한기 사이에 계약
1930. 2월말. 동아일보(1930.2.26. 기사, 1930.2.27. "송설당의 경사 30만원의 散財", 1930.3.5. "최송설당 성명서 발표" 제목 기사),
조선일보 등 전국 주요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재산 30만2천 1백원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聲明書를 발표함(1차 기부, 내역:소작 1,500석지기 토지와 현금 10만원)
- 독립운동가 韓龍雲과 애국지사 李仁의 조력, 이한기, 高德煥 등 보좌가 큼
1930. 4. 1. 김천고등보통학교후원회 조직
1930. 5. 1. 三千里 初夏號, 金壽吉의 "崔松雪堂女史一代記 - 三十萬圓을 敎育에-" 특집 기사
(이 무렵, 일제는 실업계 학교 강요, 송설당은 인문계 학교(고등보
통학교, 줄여서 "고보"라고 부름) 설립 투쟁 전개)
1930. 5. 18. 조선일보 "고보학제 변경에 절대 불응 결의"·"고보가 아니면 기부취소할터" 제목 기사 대서 특필
1930. 5. 22. 조선일보 "김천고보 인가로 또 다시 도에 진정" 제목 기사
1930. 6. 2. 조선일보 "실업교 주장하던 것 도에서도 문제 전환. 고보 실현에 노력하겠다고" 제목 기사.
1930. 6. 5. 조선일보 "당국 기정 방침으로 김천고보 불허"·"목적변경은 절대 안돼 교주의 태도 강경" 제목 기사
1930. 6. 29. 김천으로 금의환향 - 수많은 환영인파 : 만세, 꽃다발 증정, 고취 → 후에 이 길을 "송설로" 명명(1981)
1930. 11월 중순. 조선일보(1930.11.14. "白·崔兩女史의 奉仕的 事業" 제목 사설)·
동아일보(1930.11.12) 등 주요일간지 송설당의 민족교육과 사회사업 칭송

1931. 2. 5.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 인가.
1931. 3. 17. 사립 인문계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 받음(총독부 고시제145호),
校章 제정
1931. 3. 30. 초대 교장 安一英 취임
1931. 5. 9. 강당 낙성. 수업 시작. 입학식 거행 - 개교기념일로 정함
1932. 1. 8. 교가 제정(작사:정열모, 작곡:현제명)
1932. 1. 15.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鄭烈模 제2대 교장 임명
(1942. 10. 20.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 1944. 9. 30. 예심종결, 석방. 1943. 3. 7. 사립 김천고등보통학교 강제 폐교, 교장퇴임 → 공립중학교가 됨. 이후 각계의 줄기찬 노력 끝에 53년 2.18. 사립교로 환원됨)
1932. 6. 2. 東光 1932년 6월호,
李光洙, "옛 朝鮮人의 根本道德 全體主義와 求實主義 人生觀"에서 "최송설당 등의 사회봉사자들의 갸륵한 행위가 西洋式 個人主義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傳說的 朝鮮精神에서 나온 것임을 기뻐하였다."
1932. 8. 31. 本館校舍 신축 낙성
1934. 6. 상해 발행 계간지 {무궁화}에 [松雪頌] 게제됨
(임정계 애국지사 呂煥玉(여석기 동문의 父)이 지은 송설당을 칭송한 수필)
1934. 12. 1. 開闢 제2호 [개벽논단]에서 金東秀, "최송설당·白善行 등 부호가 재산을 사회사업에 내놓은 것으로 예찬함"

1935(81세) 5. 9. 교기(靑松白雪旗) 제정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주 최송설당여사 기념동상건설기성회 발기준비회" 결성
1935. 5. 23. 11인 실행위원회 결성 - 동상제작 의뢰
1935. 11. 30. 교주동상 제막식 거행(제작자 : 金復鎭)
국내의 민족지도자(宋鎭禹·呂運亨·方應模·白南薰·崔奎東·李 仁)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 참석, 金性洙·韓相龍·曺萬植·張利郁·兪億謙 축전

*呂運亨(조선중앙일보 사장) 기념사 - "본인이 경성을 떠나 남으로 내
려오는 동안에 적막한 지방상태가 눈에 띄는 것이 마치 저 광활한 사
막을 밟는 듯 하다가 김천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탑이라 할만한 김천
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 있음을 발견함에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았
다. 사막 가운데 이런 오아시스가 일개 부인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것
이라고 하니 동서고금의 역사에 그 유례가 극히 드문 것이다."

*宋鎭禹(동아일보사장) 축사 - "최송설당의 사업이 굉장한 것은 더 말
할 것이 없다. 우리가 千言萬語로 그 공덕을 말하지 아니하여도 사업
그 자체가 스스로 빛나게 될 것이다."

*方應模(조선일보 사장) 축사 - "이 학교는 남달리 봉사적 정신을 바
탕으로 하고, 홍대한 이상을 세워 광명 조선의 건설에 큰 힘이 될 것
이고, 이 학교를 창설하신 최여사의 출범한 정신에 대하여는 이미 세
인의 찬성이 높은 바이다. 여사는 모름지기 후래 민생에 큰 의범을 보
였고, 이 학교는 또한 총준을 배출하여 조선민족의 선두가 될것이다"

*李 仁(변호사) - "거룩한 여사의 뜻을 이 동상 하나로 보답할 수 없
는 것이다. 그의 뜻을 받아 이 사업이 더욱 진전되고 그 빛이 영원
히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이 이 동상을 세우고 우러러 보는 사람들의
의무이다."

*朴大輪(승려) - "조선교육계의 은인 최송설당"
*金靑庵(금강산 유점사 승려) - "송설당은 조선교육계를 위하여 성
심 전재산을 다하여 만고에 광명을 만들었다."

송설당 : 식장 치사에서 특별교실(과학관) 건축비 희사 공표 - 제2차 희
사 (동아일보 1935.12.3. 관련 기사)

# 이 무렵 독립운동가 지원한 듯함

1935. 11. 30. 조선일보 사설 "김천고보의 盛事"
1935. 12월초. 동아일보(12.1.사설 "거룩한 최송설당")·조선일보(12.2.사설 "최송설당 여사의 장거", 1935.12.5.∼ 8. "최송설당여사 동상제막식 소감" 특집기사 4회 연재)·조선중앙일보·매일신보 등 송설당의 민족교육사업을 대서 특필

1939(85세) 6. 16. 작고
유언 :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케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그 동안 저축한 교주 소유의 동산·부동산 등 나머지 전재산을 학교에 편입한다고 공증 증서된 유언장 공표 - 제3차 기부
1939. 6. 22. 교주 학교장 거행
1939. 8. 12.∼17. 동아일보 "고송설당여사의 49제를 당하야" 제목 4부 특집 연재

* 위의 글은 김창겸박사(중37·고24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의 글과 1991년에 발행한 <송설 60년사>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한자와 연도 나이 등은 읽기 편의를 위해 추가를 하였습니다
출처 : songsuldang
글쓴이 : 도두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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