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역사관

최송설당 여사의 선친 묘역 앞의 화순최씨 세장비를 찾아서

보리숭이 2012. 3. 4. 22:11

3월 4일 아침 일찍 대구에 있는 이정수부회장(송설39)에게 연락하여 최송설당 여사 부친 묘역과 최송설당 여사 비가 있다는 함평군 삼천동에 가기를 권했다. 이정수부회장이 김천에 오는 중에 김대호(송설39)에게도 연락하여 같이 가기를 권했다. 기록으로만 알 수 있었던 할머니 부친 묘소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셋은 들뜬 마음에 김천에서 거창IC를 지나 88올림픽고속도로로 광주에 가서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를 향했다.(279km 4시간 55분, 대전에서 호남고속을 타고 가는 길은 312km 3시간 34분으로 네비에 나온다.)

 

전남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三泉洞), 태곳적부터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좋은 샘이 세 개가 있었다하여 삼천동(三泉洞)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고, 김유신 장군의 기마병 삼천 군사가 주둔했던 곳이라 하여 삼천동(三千洞)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산52-1번지내에 고인돌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촌락이 형성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신광면소재지를 지나 군유산을 향하다 보면 군유산 송계마을이라는 입석과 군유로라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좁은 농로를 따라 고개 넘어 군유산 밑 삼천동 입구에 도착했다. 

 

고목이 뒷쪽에 대나무와 함께 있는 한가운데 오래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비석 앞쪽에는 배롱나무 (목백일홍) 2그루가 있다. 김천고보 설립자이며 조선 마지막 궁중여류시인 최 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이 세운 화순최씨 세장비(을묘년이면 1915년?)이다.

 

최송설당 여사가 조상의 신원회복을 하고 조상의 묘를 모시는 글을 적은 비석을 이곳 전라도에서 만날 줄이야!

 

삼천동에는 16가구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데 9가구가 김씨 일가이고, 7가구가 최씨 일가가 모여 동족촌을 아직 보존하고 있다. 최씨 일가 중 삼천동에서는 가장 큰집인 송사리 597 최정의댁을 찾았다. 현재까지 관리하시며 시제를 지내시고 계시는 분이 최정의님이시다. 마침 일요일이라 최정의님의 장남과 차남이 부모님을 뵈옵기 위해 집에 와 있었다.


최정의님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이 곳에는 인터넷에서 알아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최송설당 여사의 부모님 외에 할아버님 묘소가 있다고 한다.

삼청동 동네에서 바로 보이는 산자락에 큰 동백나무와 측백나무 사이에 최송설당 여사의 부모님 묘가 있다.  그 묘 우측에 할아버님 묘가 있다고 한다. 그녀가 세운 비석과 부모의 묘가 논밭을 가로질러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애달프다. 친족마을인 삼청동에 자주 찾은 그녀는 금화 80개를 마을에 기부했고 최씨 문중은 이것으로 일대 농지를 모두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학교역(현, 함평역)에서 이곳까지 비석을 옮겨오는데 비단을 깔고 올 정도로 송설당의 재력은 대단했다고 최정의님은 전했다.

가랑비가 나리고 있어 우선 우산을 빌려 쓰고 차남 최영식님의 인도에 따라 최송설당 할아버지 묘소로  향했다.

제일 먼저 할아버님 묘소에 이르렀다. 비석의 모습이 김천고등학교 뒷산에 있는 최송설당 여사의 수장비문과 같은 형태이다. 상석 왼쪽에는 양자로 들였다는 광익과 손녀 송설당이라는 문구가 뚜렷이 보인다. 할아버지 묘소에서 아래로 내려와 다시 산을 오르니 부모님 묘소가 나왔다.(실상 새로 길이 나서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할아버니 묘소 앞에 난 길을 똑바로 가면 부모님 묘소가 나온다.)

부모님 묘는 합장이 되어 있으며 앞에는 산아래 동네에서 보았던 동백나무와 측백나무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듯 웅장하게 서있다. 상석 중앙면에는 화순 최공 창환과 부인 경주정씨라는 문구가 보이고 우측면에 양아들 광익과 장녀 송설당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원래 묘소 양쪽에 석물이 좌/우 하나씩 있었는데 작년에 누군가가 가져갔다고 한다. 경찰서에 신고는 했는데 한번 둘러보고 아무런 후속 조치가 없다고 했다.

 

최정의님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묘소 앞에 있는 석물을 누가 훔쳐갔소. 경찰서에 신고는 했는데 한번 둘러보고는 아무 소식이 없소. 작년에는  벌초를 하려니 집안에서 아무도 벌초를 하려고 하지 않아 내가 계속 벌초를 해야한다고 주장을 하여 겨우 했소. 제사는 시제로 지내고 있소. 근디 걱정이오. 내가 죽고 나면 어매 아버지 벌초도 잘 안하려는 판국에 벌초를 할까하는 것이 걱정이오. 내가 일흔 다섯인데 몇 년이나 더 살련지 모르겠소. 자식들이 나처럼해야되는데  안할려니 큰일이여"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다행스럽게 아직까지는 선조의 묘소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에 안도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최정의님의 후손들이 계속 현재와 같이 보존에 힘쓰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 까? 최송설당 여사의 비석이라도 지방문화재로 선정하도록 하여 길이 보존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되지 않을 까?하는 걱정과 함께 김천으로 향했다.

중간에 담양의 신 덕인관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함평고등학교가 보인다.

군유산 송계마을

삼천동 마을 입구 입석

최송설당 비석

배롱나무가 비석 양쪽에 있는데 원래 더 오래된 나무를 누가 패가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한다.

 

 

 

 

 

 

 

 

 

 

 

 

 

 

 

현재 묘를 관리하시며 시제를 지내시고 계시는 좌로부터 정순님, 최영식(차남), 최정의님

최송설당 여사 할아버님 묘

 

 

 

 

 

 

최송설당 여사 부모님 묘소의 비석

 

최송설당 여사 부모님 합장 묘

 

 

 

 

 

 

 

 

부모님 묘소 앞에 동백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도 누가 캐 갈까 겁이 난다.

이곳에 석등이 있었는데 작년에 누군가가 가져갔다고..

 

최정익님의 할아버지 남익님의 묘-양자인 창익님과는 형제간

 

부모님 묘소와 관련된 송설60년사의 내용

증조부 봉관은 그의 외가 강릉유씨가 홍경래亂(1811년)에 가담하고,
그도 또한 宣川郡이 함락되었을 때 武官으로서 항전하지 않았다 하여
獄死(55세)하고, 鳳寬의 아들 4형제는 古阜로 流配되었다.

松雪堂의 부친 창환은 古阜에서 출생하고,,,,,,
부친의 3년상을 지내고 3촌,4촌을 의지해 金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定着한 뒤 5년만에 松雪堂이 태어났다.

女史의 아버지 枳南居士는 서당 훈장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항상
외다시피 先祖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1886.6.9 : 부친 昌煥이 別世하여 咸平까지 5백리길을

運柩하여 葬禮를 지냄
1894:39세에 先祖雪寃(선조설원:누명을 벗음)의 비장한 각오로 상경
.=송설60년사 교주편(321p) 崔松雪堂 略歷에 실린 내용 입니다.

 

최송설당 여사의 가문 신원복원 후 문중 현창(顯彰) 사업

     (신동아 2007.06.01 통권 573 호 (p580 ~ 595)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4]에서 발췌)

영친왕 이은의 보모가 된 지 4년이 지난 1901년, 최송설당은 고종에게 가문의 신원을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몰적(沒籍)된 최씨 가문을 복권시켰다. 최씨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한 지 무려 89년 만에 신원을 풀었다. 어린 시절 부친과 약속한 대로 조상의 원한을 푼 최송설당은 평안도 어느 곳엔가 아무렇게나 묻혀 있을 증조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김천에 허묘를 만들고 제(祭)를 지냈다.

 

가문을 향한 최송설당의 정성은 조상의 원한을 푸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송설당이 힘써준 덕분에 1901년 종9품 영릉참봉 벼슬을 얻은 양동생 최광익은 7년 만에 정3품까지 수직 승차했다. 사촌동생 최한익과 최해익도 6품 벼슬을 얻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보위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을 구실로 황태자에 책립된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최송설당은 영친왕 보모 생활을 끝내고 궁에서 나왔다. 영친왕 보모 생활 11년 동안 최송설당의 재산은 처음 상경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궁에서 받은 봉급도 적지 않았고, 궁에서 나올 때 엄 귀비가 토지를 하사했다고도 한다.

 

이후 최송설당은 제일 먼저 평안도 정주를 찾아 조상의 선영에 제를 지내고, 흩어진 친척들을 불러 모아 화수회(花樹會·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의 친목 잔치)를 열었다. 그러곤 농사를 원하는 친척에겐 농토를 사주고 공부하려는 친척에겐 학비를 지급했다.

 

1912년 최송설당은 무교정에 쉰다섯 칸짜리 저택을 짓고 ‘송설당’이란 당호를 내걸었다. 양동생 최광익의 열한 살 난 둘째아들 최석두를 입양했다. 부친도 양자를 들이고 자신도 양자를 들이는, 어찌 보면 기구한 운명이었다. 최석두는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고 자유분방한 예술가 기질을 지닌 최석두는 엄격하고 꼼꼼한 양모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최송설당은 최석두를 양자로 들인 지 14년이 지난 1926년 법적으로 수속을 밟아 파양했다.

 

1914년에는 양동생 최광익의 맏아들 최석태를 정주와 선천으로 보내 조부가 고부로 유배된 이후 104년 동안 방치한 8대조까지 선조 묘소를 찾게 했다. 김천에 허묘를 만든 고조부 최봉관의 묘소를 선천 오목동에서 찾았고, 정주 백현에서 8대조와 7대조 묘소를 찾았다. 6대조 묘소는 봉학산에서, 5대조 묘소는 아미산에서 찾았다.

 

최송설당은 서울 가좌동 석물공장에 의뢰해 최고급 석물을 제작해 기차에 싣고서 평안도 곳곳에 흩어진 선조들의 묘소까지 실어 날랐다. 오랜 세월 방치한 선조 묘소 앞에 석물을 안치하고 제수 음식을 차린 뒤 절을 올렸다. 이로써 최송설당은 조상의 죄를 씻고 가문을 일으키며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석물을 안치하는 문중의 현창(顯彰) 사업을 빠짐없이 마쳤다. 후손된 도리를 모두 마쳤을 때, 최송설당의 나이 이미 환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