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역사관

[영남일보] 돈은 어떻게 쓰는가, 송설당께 여쭤보라

보리숭이 2011. 10. 19. 11:53

 

돈은 어떻게 쓰는가, 송설당께 여쭤보라

공동 기획

 

김천고에 세워져 있는 최송설당의 동상.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였던 최송설당은 일제강점기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 1931년 김천고를 세웠다.
경북의 김천고등학교를 지나가면서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당신은 80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큰 감동을 잊었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앤드루 카네기나 워런 버핏, 빌 게이츠를 사회적 기부의 대명사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가 우리에게도 있다.

일제 때의 여인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은 고통스럽던 시절 겨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며 나눔을 실천한 ‘체온 있는 자본주의의 어머니’이다. 최근 자율형 사립고로 새롭게 출발한 김천고는 그냥 하나의 학교가 아니라, 송설당의 정신이 집약된 빛나는 문화유산 그 자체이며, 이 땅의 모든 리더들이 답사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귀족들의 나눔실천 의무)’의 성지(聖地)라 할 만하다. 1931년 2월 그녀는 전재산 30만2천100원을 내놓아 이 학교(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쌀 한가마가 13원할 때이니 쌀 2만3천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요즘 쌀 한가마 값을 15만원으로 잡으면, 34억5천만원어치이다. 현재의 가치로 따지면 300억원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쾌척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李垠·1897~ 1970)의 보모였다. 1907년 2월 이토 히로부미가 영친왕을 볼모로 잡아두기 위해 강제로 일본 유학을 보내기까지 10년간 황세자를 키우며 덕수궁에서 살았다.

김천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녀가 어떻게 궁궐까지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 배경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귀비가 있었다. 흔히 엄비(嚴妃)라 불린 순헌귀비는 원래 명성황후의 수석상궁(시위상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고종의 눈에 들어 사랑을 받게 되었다. 1885년 황후는 32세의 뚱뚱하고 못생긴 자신의 상궁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온 모습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당시 승은(承恩)을 입은 여인은 치마를 뒤집어 입음으로써 표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후 엄상궁은 궁궐에서 쫓겨난다. 그녀는 부산 동래의 어느 절에 숨어지냈는데, 이때 우연히 송설당을 알게 된다. 엄상궁보다 한살 아래인 김천의 이 여인은 불심이 깊고 마음이 어질었다. 당시 송설당은 아버지와 남편 백씨를 잇따라 잃은 뒤 불교에 의지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둘 다 외로운 처지여서 그랬을까. 엄씨에게 이 편안한 말동무는 큰 위로가 된다. 추운 겨울밤 송설당은 한땀한땀 고운 바느질로 수놓아 새긴 ‘세한송(歲寒松)’ 한 폭을 내놓으며 말한다. “눈맞는 소나무처럼 시절을 담담히 견디시면 곧 겨울이 지날 것입니다.”

김천고에 있는 송설역사관. 최송설당의 일대기는 물론, 김천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김천고 학생들은 송설당을 ‘고부(古阜)할매’라고 부른다. 금산군 군내면 문산리(현재의 김천시 문당동)에서 태어난 그녀가 왜 전라도의 고부할매로 불릴까. 그 속엔 집안의 비원이 숨어 있다.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부호군(副護軍)이었던 증조부 최봉관(崔鳳寬)은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외가가 홍경래군에 가담했고 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멸문을 당한다. 최봉관은 옥사했고, 맏아들인 최상문(崔翔文·송설당의 조부)을 비롯한 4형제는 고부로 유배된다. 그 뒤 그들은 역적의 집안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곳에서 살았다. 송설당이 고부할매로 불린 건 이 때문이다.

그녀의 부친 최창환(최상문의 아들)은 고부를 떠나 멀리 김천으로 이사를 온다. 첫부인과 사별한 그는 김천에서 경주정씨를 후취로 맞는다. 서당 훈장으로 생계를 꾸리던 최창환은 아들이 없어 집안을 일으키지 못함을 탄식했다고 한다. 이때 어린 송설당이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 사내가 아니면 못하는 일입니까?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때의 다짐을 잊지 않았던 것일까. 16세 때 머리를 틀어올리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수완이 보통이 아니었다. 20대 후반에 김천에서 큰 재산가가 되었다. 1886년(32세) 부친을 여읜 뒤에도 그녀는 가끔 친척들이 사는 고부에 들렀다. 1894년 봄 송설당은 고부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홍경래의 난으로 온집안이 진저리를 쳤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막 불붙은 난리가 너무도 두려웠다. 김천으로 부랴부랴 돌아온 뒤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갔다.

적선동에 집을 구한 송설당은 봉은사에 자주 갔다. 1896년 가을 봉은사에서 우연히 엄상궁의 친정동생(덕수궁 전화과장 이규찬의 부인 엄씨)을 만난다. 그녀는 언니의 아들 출산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송설당은 그녀와 친해지면서 오래전 동래의 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엄상궁은 동생에게서 소식을 전해듣고 몹시 반가워했다.

엄상궁은 그때 송설당과 헤어진 뒤 전국을 떠돌다가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궁궐로 돌아왔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닷새 만에(8월25일) 고종이 엄상궁을 부른 것이다. 1896년 2월 엄상궁은 러시아 세력과 짜고 고종을 궁녀의 가마에 태워 러시아공관(俄館)으로 탈출시키는 아관파천에 성공한다. 1897년 러시아공관에서 엄상궁은 임신을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송설당은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황세자를 위한 산후용품들을 준비해 엄씨의 동생에게 건넸다. 황세자를 낳은 뒤 귀비에 책봉된 엄비는 고종에게 이 일을 전했다. 황제는 덕수궁으로 그녀를 불렀다. 고종은 시문(詩文)에 능하고, 언행이 반듯한 송설당을 황세자의 보모로 임명한다. 운명은 이렇게도 풀려나간다. 고종을 만났을 때 엄비가 말했다. “지난 날 떠돌 때 최씨가 세한(歲寒)의 눈덮인 소나무를 말하면서 병약한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고종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허허, 그랬는가. 그대야 말로 송설의 집(松雪堂)이라 할 만하구나. 내 그렇게 부르리라.” 그녀가 송설당이란 호를 가지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1901년 11월 송설당은 잊을 수 없는 감격을 만난다. 홍경래의 난으로 몰적(沒籍)된 화순최씨 가문의 죄를 사면하여 복권하라는 고종의 어명을 얻어낸 것이다. 호적에 이름도 오르지 못한 여자의 힘으로 집안의 90년 족쇄를 푼 셈이다.

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고 그해 6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자, 송설당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10년간 충직한 말벗이자 아들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다가 궁궐에서 떠나는 그녀에게 엄비가 영친왕에게 속해 있던 상당한 토지를 건네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녀의 ‘나눔’에 관한 기사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부터 등장한다. 미국 동포가 간행하는 공립신보를 보다가 의연금을 모집하는 취지서를 읽고 감동해 4원을 기탁했다는 기사다.

이후 1912년 김천 교동 주민을 위한 벼 50섬 희사, 1915년 경성부인회 거액 기부, 1917년 김천공립보통학교 기부, 금릉유치원과 금릉학원 유지비 쾌척, 소작인에게 1년 추수를 그대로 내줬다는 조선일보의 미담기사로 이어진다.

송설당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해인사에 기부하려고 했으나, 당시 사찰에 친일세력들이 많아 돈이 헛되이 쓰일 수 있다는 만해 한용운의 의견을 따라 교육사업에 쓰기로 결심했다. 재단 설립자금으로 기부한 재산은 김천, 김해, 대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20만2천원 상당의 토지와 10만원의 은행예금까지 모두 30만2천원이었다. 일제 학무국(學務局)은 인문계 학교라는 이유로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또 1930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가을 쌀값이 폭락해 기부된 토지에서 나온 소출로 공사대금을 치르기에는 비용이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송설당은 자신이 살고 있던 무교동 55칸 집까지 내놓았다. 대지 234평 집값은 2만5천원이었다. 그녀의 굽히지 않는 소신에 일제는 결국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1930년 2월27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에 관해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부(富)가 사회적 생산이니 만큼 그 소수의 인사는 부의 청직(廳直)이요, 관리인이라 할 것이다.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이를 산(散)하고 용(用)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요 사명이다. 그러나 세(世)의 재(財)를 만든 사람으로서 능히 그 책(責)을 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1932년 6월2일자 ‘동광(東光)’에서 춘원 이광수는 “최송설당 등 사회봉사자들의 갸륵한 행위가 서양식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오, 도리어 전설적 조선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1939년 6월16일 눈을 감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邦定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학교가 영원하도록 하여 민족정신을 키워라.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한 사람이 동양을 지배한다. 이 길을 꼭 지켜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Story Memo

최송설당의 묘는 김천고등학교 뒷산 송정(松亭) 옆에 있으며, 교정에 송설당 동상이 서 있다. 1935년 10월 최초의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시인 팔봉 김기진의 형)이 그곳에 동상을 세운 바 있으나, 1945년 6월 일제가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강제공출해 광복 이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녀는 생전에 부곡동 뒷산에 조상을 모시는 고부재실(古阜齋室)로 정걸재(貞傑齋)를 지었으나, 6·25전쟁 때 불탔다. 1922년엔 3권3책으로 된 ‘송설당집’을 출간했고, 50편의 가사와 258수의 한시를 남겼다. 한편 송설당이 고부와 김천의 기생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녀는 ‘고부댁’이란 술집을 차려 큰 돈을 벌었으며, 이후 궁궐에 들어온 뒤 재혼한 남편(이용교)에게 창원과 김해의 군수직을 알선해줬고, 그 남편은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는 주장도 있다.(대한제국 시종원 부경(副卿·대통령 비서실 차장)을 지낸 정환덕의 비망록 ‘남가몽’에 기록됨)

<스토리텔링 전문작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 : eride GyeongB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