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임실 용암리 석등

보리숭이 2010. 10. 5. 02:12

 

 글쓴이 : 별꽃 원글보기

구름과 햇살이 서로 밀거나 당기면서 명암이 교차하는 들판을 보면서 마지막 답사지인 ‘임실 용암리 석등’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남향의 공터에 자리한 석등의 위치는 개암사 법당처럼 절묘했다.

석등은 짐작한대로 크기가 압도적으로 크고 비례와 균형이 탁월했다. 태양은 아직도 하늘 높은 곳에서 쨍쨍하게 빛나고 시간은 넉넉했다. 우람한 석등을 돌면서 이리저리, 요모조모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까이 혹은 멀리서 바라보아도 용암리 석등은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키가 훤칠한 대장부 같이 장쾌하다.

석등보다 한 단 높은 평평한 공터에는 석등보다 크기가 작은 3층 석탑 부재가 몸돌을 잃어버린 채 3개의 지붕돌과 1개의 기단이 층층으로 포개져있다. 원래는 이 석등자리가 들판이었고 석탑이 있던 곳에는 집 한 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문화재관리 차원으로 집 한 채를 헐었는데 대신에 석등 주변에는 새로 지은 집들이 보여서 옛날보다 보는 맛은 반감되었지 싶다.

비스듬히 비치는 석양을 받으면서 석등 뒤 돌계단에 우리는 앉고 스님은 서셨다.

“여기 석등 하나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답사는 알찬 답사입니다. 혹자는 이런 석등을 보고도 본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면 무엇을 보아야 만족하겠습니까? 이 석등은 바라만 보아도 힘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스님은 용암리 석등 원고를 읽으셨다.


“상륜부 대부분이 사라진 현재의 높이만도 5.36m에 이릅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논산 관촉사 석등의 높이가 6.01m이니까 현재 높이로는 조금 작지만, 관촉사 석등은 상륜부가 온전한 반면 용암리 석등은 그렇지 않으니 만일 상륜부가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두 석등은 거의 맞먹는 크기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이 석등은 화엄사 석등에 이어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둘째나 셋째쯤 큰 셈이 됩니다. 이만한 석등이 가릴 것 없는 텅 빈 밭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실로 장대합니다. 용암리 석등은 크기에 걸맞게 조각 솜씨 또한 오종종하지 않습니다. 부분 부분이 뚜렷하고 큼직큼직하여 대범한 손놀림이 감지됩니다. 이 석등은 저무는 신라가 마지막 힘을 불끈 모아 이룩한 한 개의 불꽃인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빛을 뿌리는 장엄한 낙조인지도 정녕 모를 일입니다. ”

그리고는 스님은 “시간이 넉넉하니 석등을 충분히 감상하세요. 전체와 세부도 잘 보세요”하신다. 모두들 다양한 표정과 각도로 석등을 보면서 혹은 쓰다듬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한동안 석등 주변에서 놀았다. 스님은 슬라이드 필름을 넣은 사진기와 디카를 번갈아 가면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자 또 다시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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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 지붕돌의 팔각의 낙수선과 낙수선 중앙이 파도를 타듯 위로 미세하게 살짝 솟구친 모양을 보세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근처 담양의 개선사터 석등은 확실하게 솟아올라 지붕돌의 낙수선이 16각인데 그런 형상이 여기에도 나타나네요, 잘 보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빙글빙글 석등 주변을 돌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상륜부의 부재 중 노반 위에 얹힌 팔각 석재가 영 어색하다. 보통 노반 위에 복발이 올라가는데 왜 이 석등에는 뜬금없이 팔각의 쟁반같은 석재가 올라가 있을까? 멀리서 보니 그 팔각의 석재도 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상대석의 힘찬 연꽃잎 조각은 마치 성난 왕코브라가 돌진하듯 힘이 있는데, 간주석 중앙의 북모양의 연꽃잎과 지대석의 안상은 조각이 얕아서 음각선으로 살짝 금만 그은 것 같다. 김창순 법우님은 만든 장인이 서로 다르다고 했고, 스님은 설계도대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간주석과 상대석 사이 두 장의 상대석 받침돌의 일부는 옆과 석재가 다르고, 상대석의 연꽃잎 일부는 조각칼로 도려낸 듯 비었다. 하긴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석등이니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간난신고를 겪었을것인가?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석등을 바라본 후에 귀갓길에 올랐다.
이번 답사는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속이 꽉 찬 알찬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