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려운 일이었다, 저문 길 소를 몰고 굴을 지난다는 것은. 빨갛게 눈에 불을 켜는 짐승도 어둠 앞에서는 주춤거린다.
작대기 하나를 벽면에 긁으면서 굴을 지나간다. 때로 이 묵직한 어둠의 굴은 얼마나 큰 항아리인가. 입구에 머리 박고 소리지르면 벽 부딪치며 소리 소리를 키우듯이 가끔 그 소리 나의 소리 아니듯이 상처받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한 발 넓이의 이 굴에서 첨벙첨벙 개울에 빠지던 상한 무르팍 내 어릴 적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 없다. 유혹당하는 마음조차 용서하고 보살펴야 이 굴 온전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이 긴 어둠 어둠 아니다.(굴을 지나면서) 전문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금릉군 봉산면 태화2리 794번지. 지금은 금릉군이 김천시에 통합되었다.
태화2리 794번지는 나의 집 뿐만 아니라, 두 큰아버지 가계에서도 쓰는 번지이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기 때문이라는데, 아직도 이 번지수는 나눠지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시골에서 주택의 번지수가 뭐 그리 대수로울 것이 있겠는가. 그곳에 집이 있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그만일 테니. 아마도 도시 같으면 우편물 배달에 곤란을 느끼겠으나, 시골 집배원들은 같은 번지를 쓰더라도 이름만 대면 어느 양반이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큰 불편없이 살고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뵌 기억은 없다. 법없이도 살았던 분들이라는 동네 어른의 말씀만 들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형을 다섯 두었고, 남동생을 한 명 두었으며, 누나를 둘 두었다. 그야말로 대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다섯 번째 형이 시골에서 난 수재여서 서울에 가 대학공부를 마쳤는데, 그 큰아버지의 학비를 대느라 시골에 있던 논밭과 소를 팔아 나의 아버지에겐 학비를 댈 여력이 없었고, 해서 아버지는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 큰아버지도 청운의 꿈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아무튼 나의 아버지는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학업을 그만 두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더 상세한 속사정을 여쭐 수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공부할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한다는 것을 더러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령 아버지가 엎드려 한자를 익히는 때나 신문에 난 기사를 폐지같은 곳에 따라 옮겨 적을 때, 그런 나의 짐작과 추측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나의 아버지는 몸이 굵어질 때부터 논과 밭과 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일흔을 넘어섰다.
나의 부모는 얼음을 깨고, 그 물에 몸을 씻은 후 나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음력으로 1970년 9월21일에 이 세상에 왔다. 어머니에게 태몽이 있었다고 했다. 아주 좋은 태몽이었다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어머니는 말씀을 아꼈다. 나도 한 두 번 들었으나, 귓가로 듣는 통에 이젠 관심과 기억에서 멀어졌다.
위로 누나 둘을 두었고, 아래로 여동생 둘을 두었다.
최초의 기억이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생각해보지만, 이 세상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누나가 나를 업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보다 다섯살이 많은 누나가 나를 주로 업었는데, 글쎄 그게 몇 살 무렵이었는지도 분명치는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울던 나를 누나가 그렇게 잘 업어주었던 것 같다. 누나가 열살에 나를 업었다면 나는 다섯살이 되었을 터, 배가 고프거나 들일 나간 엄마가 보고 싶어 울면 누나는 나를 업고 좁은 마당을 빙빙 돌거나 감나무 아래 서있곤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결혼하면서 물려받은 땅이 두 마지기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것도 하늘만 바라보고 짓는 천수답이나 다를 바 없는 산 아래 땅이었다. 그래서 남의 집에 품을 파는 쟁기질과 써레질을 했다. 그런 형편이니 먹을 게 넉넉하지 못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식구들은 호롱불 아래서 생활을 했다. 그리고 방안에는 잠박이 있었다. 누에와 함께 밥 먹고 자는 방이었다. 누에 냄새와 뽕잎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뽕밭에 가서 뽕잎을 따는 일을 했다. 비 듣기 전 급히 뽕잎을 따던 여름날이 생각난다.
외할머니가 홀깨로 훑은 벼처럼 세월의 흔적이 그러하다
인기척 없고 뜰팡 하나 없이 집터만 남은 세월
십년 동안의 몽유
봄날 미나리꽝을 지나가는 텃물에 손목을 담근 것 같다
내 몸을 눕히면 봄볕을 받아주던 마루
깊은 젖가슴을 드러내던 아궁이
한때 이곳은 꽃의 구중궁궐이었으나 (옛 집터에서) 전문
나의 생가는 없어졌다. 누군가에게 팔렸고, 집은 헐렸고, 결과적으로 나의 생가가 있던 땅은 나의 사촌형이 소유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생가가 있던 땅을 다시 사들일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사촌형에게 간곡하게 부탁해야겠지만. 얼마 전 가보니 작은 포도밭이 들어서 있었다. 풀을 먹이러 소와 염소를 몰고 풀밭을 찾아가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물론 동무들과 무리를 지어 다녔다. 소 여러 마리를 줄 지어 몰아 풀밭을 찾아 갔다. 소들 뒤로는 까만 염소들이 뒤따라 왔다. 우리는 풀밭에 소와 염소를 풀어놓았다.
꼴을 벤 다음, 벌집을 떼어내느라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고, 나무를 깎아 만든 칼을 들고 놀았다. 해가 떨어지고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오면
논이 있는 새뜰이라는 곳을 가려면 굴을 하나 지나가야 했다. 마을에는 경부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그 철길 아래로 굴을 내서 이쪽 들녘으로부터 저쪽 들녘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 굴을 통해 저수지로부터 농수가 내려왔고, 경운기와 소와 염소들이 지나다녔다.
물론 들밥도 굴을 통해 들로 나갔다. 모내기 무렵은 장관이었다. 쟁기질을 끝내면 물을 가두었고 써레질을 했다. 아버지가 써레질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누나와 나는 모를 쪘다. 모를 다 쪄 무논으로 나르면 모내기 준비는 끝이 났다. 그러면 오후에 동네 사람들이 왔다. 줄을 지어 모를 심는 동안 노래가 흘렀다. 뻐꾸기가 우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광주리 가득 새참이 오면 풀밭에 앉아 모두들 나눠 먹었다. 아래 윗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함께 먹었다.
모내기가 끝나고 다음날 새벽이면 아버지가 누나들과 나를 깨웠다. 논두렁에 콩을 심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콩을 심었다. 작은 구멍을 내고, 서너 개의 콩을 넣고 구멍을 막았다. 콩을 심고 내려오던 봄날 아침의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새뜰에서 수확한 곡식들이 굴을 지나 집으로 왔다. 굴은 캄캄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그 굴을 지나다니는 것이 무척 무서웠다. 길이는 70여m 정도 될까 말까 했지만, 내부가 어두워 지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소가 수로에 빠지거나, 경운기가 수로에 빠지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작대기를 하나 들어 굴의 벽면을 긁어가며 내왕했다. 물론 한쪽 손에는 소의 고삐가 쥐어져 있었고, 소는 눈에 불을 켜고도 겁이 나는지 잘 따라오질 않아서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마을에는 두 개의 저수지와 두 개의 굴이 있었다.
지금은 하나의 저수지가 거의 메말라서 가두어 둔 물이 적고 바닥이 드러날 정도가 되었지만, 다른 한 곳의 저수지는 늘 물이 많았다. 동네 형들은 그 저수지를 한 바퀴 헤엄쳐 도는 것으로 그네들의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을 자랑했다. 나는 헤엄치는 것이 서툴렀고, 깊은 물에 공포가 있어서 형들처럼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또 저수지에는 거머리가 많았다. 물을 많이 가둔 저수지도 농사철이 끝날 즈음에는 가끔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저수지 물이 거의 마른 날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저수지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뻘 속에서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잡혀 나왔다.
마을에서 누군가 올라와 거머리밥이 되기까지의 자살행위가
빗발을 받는 이 토란잎의 이력이다
한배의 새끼를 낳는 토끼장에 누런 족제비 한 마리를 들여놓고 그놈들끼리 물고 뜯는 것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듯
유쾌하게 나는 내 낚싯대를 당기는 물밑 유속과
더 밑에 가라앉은 돌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씨알 굵은 고기들의 저 근육이 어디서 연유할까
오리떼가 더 깊게 절구통을 찧어댈수록 혼자 남아 있자니
이 토란잎이 서낭당 같아 더럭 무서워져 낮게 중얼거린다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비 지나가는 저수지) 중에서…
대개의 저수지들이 그러하듯 우리 동네 저수지에서도 사람이 빠져 죽는 일이 가끔 있었다.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난을 비관해서 한밤중에 저수지에 투신한 사람이 있었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마을회관에서 동회를 열어 저수지에 있는 물을 빼는 것에 대해 논의를 했다.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작은 개울은 마치 장마철을 맞은 것 같았다.
동네에는 상여가 나가는 날이 많았다. 상여가 나가는 날에는 방문을 모두 닫고, 널어놓은 빨래를 걷었다. 죽은 혼이 갈 곳을 잃어 혹시 집으로 들어올지 모른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묘를 파는 일을 하러 갔고, 돌아오실 때에는 흰 장갑과 고무신과 떡을 갖고 오셨다.
내가 쇠죽을 끓이고 있으면 아버지는 그 아궁이 숯불에 떡을 구워주셨다. 나는 산으로 사람을 보내는 의식에 쓴, 조금은 굳어버린 떡을 먹으며 막연하게나마 죽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날에는 평소에도 말씀이 적던 아버지의 말수가 더 적어졌다. 아버지는 두툼하고 거친 손으로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상여가 나간 다음날, 식전에는 새로 생긴 무덤 앞에서 곡을 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곡소리가 아침 하늘을 가득 메웠고, 그 공중을 수많은 까마귀들이 선회했다. 나는 마당에 서서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본 후 등교를 하곤 했다.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네 집의 다락방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인 문태준은
1970년 김천에서 태어나 김천고(송설53회),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느림보 마음)이 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글=문태준(시인) 영남일보 2010-06-07 영남프리핑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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