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지난 '문학예술'지 32호에 실렸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조병삼

보리숭이 2010. 6. 9. 07:26

경북선은 중앙선의 분기점인 영주에서 출발하여 경부선의 분기점인 김천을 연결하는 철도길이다. 칠십 년대는 성공을 향한 부푼 꿈을 안고 도회지로 떠나려는 사람들과 문경과 점촌 등지에서 캐낸 석탄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철도길이다. 때로는 소백산 줄기를 가로질러 느릿느릿 달리기도 하다가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만나면 한숨에 휘휘 돌아 달음박질치며 평야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포효하듯 기적을 울리며 가는 기차를 볼 때면 뛰는 기관차의 심장만큼 우리들의 가슴도 뛰었었다. 경북선의 간이역 중에 옥산역이라는 곳이 있다. 영주에서 출발하여 온힘을 다해 힘차게 달려 온 기차가 김천을 향한 마지막 관문인 ‘여남재’를 앞에 두고 잠시 쉬어가던 역이다. 예전에는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던 기차가 흔하던 시절이라 가파른 여남재를 오르기 위해 옥산역에서 잠시 쉬면서 석탄과 물을 채워 힘차게 고갯길을 오르곤 하였다. 그래서 옥산역에는 여느 역과는 다르게 첨성대를 닮은 물탱크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당시는 인근에 이층집도 귀하던 시절이라 물탱크탑을 보는 일은 경주의 첨성대를 보는 일만큼이나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인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곁눈질로 물탱크탑을 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기차를 가재눈을 뜨고 바라보기도 하였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이라 말로만 듣고 실제로는 기차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산골 아이들도 기차가 지날 즈음이면 숨가쁘게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고 기적소리 울리며 지나가던 기차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곤 하였다. 말이 간이역이지 그 당시 옥산역은 여느 도회지 역 못잖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인근 각처로 떠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읍내로 통학을 하던 학생들, 거기에다가 방물장수처럼 여러 가지 일용품을 팔러 다니는 장사치들도 어쩐 일인지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러니 자연적 역 입구는 시장처럼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빌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알전등을 켜고 오고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며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을 팔던 사람들. 가까운 곳에 오일장이 서는 시장통이 따로 있었지만 역 주변은 매일 시장이었다. 그러던 옥산역이 세월 따라 변하는 인심처럼 걷잡을 수 없는 영욕의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토록 번잡했던 옥산역이 칠팔십 년대 이후 갑자기 불어 닥친 자동차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입성 좋은 아낙의 토악질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개찰구를 오가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플랫폼에는 낡은 깃발만이 바람에 펄럭이고 길다랗게 펼쳐진 두 갈래 철길은 가을 햇살 속에 아지랑이로 아른거린다.

 

희끗희끗 바래지는 시간을 부여잡고 늦은 가을 오후의 햇살을 향해 읍소하듯 앉아있는 노인네 너 댓 명의 주고받는 마른기침 소리만 낡은 역사의 고요를 흔든다. 추억 속의 풍경이 되어버린 옥산역. 그런데 그 옥산역의 물탱크탑이 보이지 않는다. 첨성대처럼 만들어졌던 그 물탱크탑이 헐렸단다. 디젤기관차가 생기고부터 물탱크의 쓸모가 사라져 몇 년 전에 부셔 버렸단다. 각 동네나 마을에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거나 그 동네를 상징하는 상징물들이 있다. 그것이 뿌리 깊은 느티나무여도 좋고, 소원종이가 가득 붙어있는 성황당 나무여도 좋고, 오며가며 쌓아놓은 돌탑이면 또 어떠랴? 사람들이 모여들고 동네가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 동네는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게 된다. 그것이 한 사람의 생애가 되기도 하고 한 가족의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혹은 한 동네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애와 이야기와 역사를 고스란히 보고 듣고 품어온 마을의 상징물은 그것 자체가 역사다. 없어지지 말아야 한다. 동네의 오래된 느티나무는 그 동네 사람들의 대소사를 다 알고 있다. 어느 집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떠나고 누가 돌아왔는지 다 알고 있다. 성황당이 그러하고 돌탑이 그러하듯 옥산역도 그러하고 물탱크탑 또한 그러하다. 동네 사람들의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응시하며 그 아픈 질곡의 역사를 견뎌온 옥산역은 그래서 없어지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오가는 사람이 없고 바람과 햇살만이 덩그라니 놓여지더라도 옥산역은 없어지면 안 된다. 우리들의 기쁨과 슬픔을 간직한 채로 저 혼자 낡아가는 옥산역은 우리들의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사용이 몸에 배어 있는 요즈음, 때때로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고향에 가고 싶을 때는 이제 기차를 타고 가야겠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시절을 잠시 접어 두고 기차를 타고 느릿느릿 고향에 가야겠다. 가는 길에 옥산역에 들러 잡초 우거진 곳에 있었던 물탱크탑을 회상하며, 그 탑을 보고 첨성대 본 듯 좋아라 했던 어린 시절의 한 아이를 떠 올리며 천천히 플랫폼을 걸어 나오고 싶다. 만약 가난의 질곡을 견디다 못해 서울로 떠난 맏아들을 그리워하며 애면글면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물 젖은 가로등이 남아 있다면 그 아래 나무의자에 잠시 앉아 추억을 떠 올려 보리라. 행여 기차가 지나간다면 천천히 손을 흔들며 플랫폼을 걸어 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