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스크랩] 화암사 - 흥선스님 <가야산과 덕유산>중에서

보리숭이 2009. 9. 18. 22:46

 

 

 1. 화암사 가는 길...

 

부처님의 광휘가 연상되는 불명(佛明)이라는 산과

꽃바위절을 뜻하는 화암사(花巖寺)라는 이름이

찾아가는 마음을 다소곳하게 한다.

 

실제로 화암사 가는 길은 요란하지 않다.

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가나 식당가, 주변에 민가도 거의 없다.

 

봄이면 얼레지와 현호색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길이며,

여름에는 푸르름이 가득하게 밝은 그늘을 만드는 길이다.

또한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이 고운 햇살에 바스락바스락 몸을 뒤집는 길이며,

겨울에는 텅 빈 듯한 공간에서 한적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길이다.

 

한없이 부드럽고 평온한 그 길을 걸어 오르면

마치 세속을 버리고 들어오라는 듯

작은 개울에 걸려 있는 나무다리를 지나게 된다.

 

화암사에는 산문이 없다.

옛 절이라면 어느 절에나 있게 마련인 일주문이 여기에는 없다.

사천왕문, 금강문, 해탈문, 불이문...

그 어떤 문도 없다.

 

그 때부터 길은 계곡을 따라 암반 길로 연결되고

벼랑에 기대어 있는 철계단을 지나면

홀연 화암사 우화루를 눈앞에 보여준다.

 

 

2. 화암사의 내력 

 

 

 

           <화암사 중창비>

받침대를 포함해도 1.7m가 안되는 작은 대리석비.

15세기 이전 화암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화암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삼국시대 말기쯤인 듯하다.

 

<중창비>에

절의 동쪽에 원효대(元曉臺)

절의 남쪽에 의상암(義相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 조선 전기까지 의상스님이 만든 관음상이 남아 있었고

의상암은 15세기에는 물론 한국전쟁 와중에 없어지기 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다만 이곳이 백제 영토였을 텐데

어떻게 신라계 사찰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을 수 있고,

 

그것은 의상이나 원효 이전에

이미 백제인들에 의해 세워진 절이

신라세력이 밀려들면서 주도권이 바뀐 것으로 본다.

 

화암사는 지형적 요인때문에

큰 절로 유명해지지는 않았지만

세속에 숨겨진 산사로 사랑받았던 것 같다.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백문절(白文節)

화암사를 7언 40구의 긴 한시로 읊었는데

그 시에 "계곡에 가로 걸린 작은 정자엔 온 벽에 하나 가득 시가 걸리고' 하는 구절로 보아

많은 시인가객들이 화암사를 찾았음을 알 수 있고,

 

대덕연간(大德年間, 1297~1307)에 달생(達生)이라는 인물이 중창하고,

 

120여 년 뒤,

기이하게도 같은 이름의 성달생(成達生)이 다시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화암사의 골격은 1440년 이 무렵

선승당(선승당), 조성전(조성전),  부엌, 수각, 측간까지 고쳐진 듯하나,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침입으로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해 화재를 당하고,

극락전은 1605년, 우화루는 1611년 다시 복구된다. 

 

그래서 현재까지 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17세기 절간들의 짜임새와 분위기를 담고 있다.

  

 

 

 

3. '꽃비 흩날리는 누각' - 우화루(雨花樓).

 

입구를 통과하면 하늘만 보이는 작은 ‘ㅁ’자 모양의 절

조금은 폐쇄적인 듯한 화암사의 구조는

기묘하게 절의 어느 곳을 바라봐도 하늘을 바라보게 만든다

 

현재 조계종 제17교구의 말사인

화암사는,

8백여 평 대지위에

극락전, 적묵당, 불명암, 명부전, 철영재, 우화루, 산신각, 문간채 등

여덟 채의 건물이 있다.

 

대체로 절집 누각은 개방적이어서

기둥만 세운 가운데 칸을 통해 어두운 계단을 오르면

안마당 밝은 부처님의 세계로 이르게 되어 있건만,

 

우화루(雨花樓).

'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멋진 이름의 화암사 누각은 다르다.

  

아래층 앞쪽 한  줄만 기둥을 세우고

중간과 뒷부분은 막돌을 차곡차곡 쌓아 축대로 이어지니

누각 아래 전체가 벽처럼 막혀 좌우로 꺽어져 진입할 수 밖에 없다.

 

절의 앞쪽에서 보면

위층은 널벽에 칸마다 바라지창을 달려 있는

우람한 다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2층 누각이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면 단층구조다.

 

우화루는

집의 외형이나 가구, 공포 등의 세부 수법에서 개성을 찾기보다는

공간의 특성과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화루의 마루바닥과 안마당의 지면은 거의 높이가 같다.

이 말은 건축적으로 우화루 내부가 안마당의 연장,

혹은 안마당이 우화루의 지속이라는 뜻이 된다.

 

이런 관계는 비단 우화루와 안마당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락전과 적묵당, 불명당에까지 확장된다.

 

결국 안마당을 중심으로 둘러선 네 건물은

상호 소통하는 구조를 가짐으로써

지붕의 유무에 상관없이 단일한 공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공간이

단일한 공간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된 공간들 사이에

수직적 위계가 뚜렷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평성.

바꿔 말해 평지성

백제계 건축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지형상 평지와는 거리가 먼 화암사에서

백제계 건축의 면면한 전통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화암사 목어>

       우화루 한켠에 걸려 있는 투박한 조각의 목어이다.

     단청도 벗겨지고 먼지도 많이 쌓여 있지만 정감 있다.

 

 

  

4. 화암사 문간채

 

화암사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길도 특이하다.

우화루 아래 길이 없으니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화루 왼쪽으로 돌계단이 있고

그 위에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는 민가의 그것과 꼭 닮은 3칸 일(一)자집이다.

3칸 가운데 왼편 두 칸은 방이고

제일 오른쪽 한 칸을 '대문'으로 쓴다.

 

절집에 문간채가 있는 것도 새롭거니와

하필 가운데가 아닌 옆칸을 문으로 활용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대문은 문턱이 아래로 휘우듬히 휘어졌고

문미(門楣)는 반대로 위로 부드럽게 굽었다.

 

애초부터 수평재를 쓰지 않고

용도에 맞는 나무를 생긴 대로 골라 쓴 결과다.

 

처음부터 적당한 곡율(曲率)을 가진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적 안정성과 시각적 자연미를 동시에 얻고 있는 것이다.

작지만 소중한, 지혜의 소산이다.

 

대문을 들어서서 지붕을 맞댄 우화루와 적묵당이 만나는  

모퉁이 사이를 빠져나가면 안마당이다.

 

화암사의 중심으로

네 귀가 트인 채 반듯하게 네모난 모습이다.

 

북쪽에 남향하여 본전인 극락전이 있고

그와 마주하여 우화루,

왼쪽과 오른쪽에 승방으로 쓰이는 적묵당(寂默堂)과 불명당(佛明堂)이 동서로 마주보고,

극락전과 불명당 사이로 단칸집인 철영재(綴英齋)가 있고,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 명부전(冥府殿)이 자리한다.

 

화암사 안마당은 작다.

네 채의 건물이 처마가 닿을 듯하다.

실제로 우화루와 적묵당은 지붕 끝이 맞닿아 있다.

 

작아서 갑갑할 듯 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아마도 건물의 배치와 높이 때문인 듯싶다.

         

크기로 넷 가운데 세번째인데도

극락전은 용마루가 가장 높아 지표에서 8.7m로 본전으로 위용을 보이고,

 

다음으로 지붕이 높은 건물이 우화루로 극락전과 1m 차이가 나고

적묵당은 우화루와 0.8m,

적묵당과 불명당은 차이가 좀더 심한 2m 더 낮다.

 

말하자면 건물이 사방을 에워싸서 폐쇄적인 구조이긴 하되

각 건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높낮이에 변화가 다채로워 단조롭고 지루한 맛을 깨트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 이만한 높이의 건물을 바라볼 때 시각적 안정감이 높다.

극락전 용마루를 바라보는 앙각(仰角)이 16.5도,

우화루 용마루는 앙각이 13도다.

 

보통 피사체가 중심시선에서 상하좌우로 15도를 벗어나지 않아야

우리 안구(眼球)가 무리없이 움직인다고 할 때

화암사 안마당은 그런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는 구조 속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모서리 부분을 막는 것이

변 쪽을 차단하는 것보다 폐쇄감이 훨씬 크다고 하는데,

다행히 화암사는 네 건물이 만나는 모서리마다 적절한 트임을 보인다.

그래서 답답함보다는 안정감, 편안함, 아늑함, 안온함을 느끼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5. 극락전(極樂殿, 보물 663호) - 국내 유일의 백제계 하앙구조

 

 

우화루을 마주하고 있는 극락전은

앞면 3칸과 옆면 3칸 크기에 맞배지붕으로 

오랜 세월로 인해 단청을 버리고 나무의 맨살을 드러낸 채 자리하고 있으며,

극락전은 국내 유일의 백제계 하앙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앙구조(下昻構造)

기둥 위에 중첩된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를 가리킨다.

 

이 하앙의 끝부분 위에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으면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일종의 겹서까래 구조로

실용성과 장식에 대단히 유용한 구조재라 하겠다.

 

이를 백제계 양식으로 보는 이유의 하나는

하앙에 의해 만들어진 깊은 처마는 강수량이 많은 평야지대,

즉 백제지역에 적합한 기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장인들에 의해 이룩된

일본의 호류지(法隆寺)의 금당(金堂)과 오층목탑에 하앙이

유력한 물증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하앙구조는 중국과 일본에서만 발견됐다.

그동안 일본학자들은 하앙구조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6년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구조가 학계에 보고됨으로

일본 측으로서는 충격이었고

우리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발견으로,

 

심지어는 '해방 이후 건조물 문화재계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까지 나왔고

화암사 극락전은 국내외 전문가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직 이 건물만 천 년 세월을 거슬러

백제계 구조법을 지켜올 수 있었을까?

 

지금의 극락전의 하앙이 바로 백제시대의 하앙과 일치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러 차례에 걸친 중창에도 불구하고

기본은 백제시대의 형식을 지키며

시대에 따른 양식상의 변화를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하앙의 앞면은 장식적이고 뒷면은 구조적이다.

 

앞면 공포의 형상은

일반 다포계 건물과 같되

살미첨차의 머리를 경사지게 하여 그 위에 하앙을 받았다.

 

그리고 하앙의 부리 위에는

소로를 얹어 외목도리를 걸쳤으며,

다시 그 위에 용머리를 조각한 부재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앙의 부리를 자세히 보면 용의 발 모습임을 알 수 있는데

끝부분은 화염이 이는 여의주를 발톱으로 움켜쥔 모습을 투각으로 표현하였다.

하앙 전체를 한 마리의 용으로 형상화한 화려한 기법이다.

 

반면 뒷면의 하앙은 훨씬 원형적이다.

위치와 짜임은 앞면과 같지만

도리 위에 용머리도 없고

하앙의 부리 또한 아무런 장식 없이 길게 삼각형을 이루며 날카롭게 잘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뒷면의 하앙 형태를 임란 이전의 양식, 

앞면의 것을 임란 이후의 양식으로 본다. 

 

극락전은 다포계 건축이지만 전형적이지는 않다.

 

주심포계의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붕만 해도 주심포 양식과 짝을 이루는 맞배지붕이며,

주심포계와 다포계의 변별점이라 할 주간포(柱間包) 역시 정면의 어간에 두 틀이 놓이고,

그밖의 다른 칸에는 한 틀씩 놓여 과도적인 양상을 보인다. 

 

주심포 양식 또한 그 연원을 백제시대에 두고 있지만

현존하는 고려 건축물에서 보듯이 그것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건축양식이다.

여기에 고려말에 도입되어 각광받던 다포계의 공포양식이 절충된 것으로 보인다.

 

공포를 받치고 있는 주두(柱頭)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둥 위의 주두는 일반적인 모양이지만

정면 주간포 밑의 주두는 생김새는

연잎을 닮은 흔치 않은 모양새로

옛 백제지역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비슷한 예가 부안 개암사(開巖寺) 대웅보전에 남아 있다.

 

극락전 단청도 주목에 값한다.

 

예의 묵서명에 의해 1714년에 단청했음을 밝혀졌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 상태가 안팎이 상당히 다르다.

 

안쪽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무늬와 채색을 거의 온전히 식별할 수 있음에 비해

바깥쪽은 박락(剝落)도 많고 퇴색도 심한 편이지만,

 

호남지방 특유의 유순하며 명랑한 색조와 색감이 잘 표현된 단청은

전체 분위기가 중간 색조의 은은한 멋을 풍기면서도 격조 높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받는다.

 

특히 두드러진 부분은 출목과 출목 사이의 빈 공간을 판자로 메운

순각판(巡閣板)에 그려진 비천상들이다.

 

천의자락 나부끼며 하늘을 나는 천녀의 모습이 뚜렷하다.

얼굴은 복스럽고 색조는 부드러우며 필선은 자유분방하다.

 

극락전 편액 또한 재미있다.

極. 樂. 殿

 

이렇게 한 글자씩 작은 판자에 써서 정면 어간 포벽 위에 나누어 붙였다.

그 이유를 "화려한 포작과 하앙의 장식성을 편액이 가리지 않도록 배려한 결과'라고도 하고

주심포와 주간포의 첨차 길이가 달라서 생겨난 불균형을 가리기 위해서라고도 설명한다.

그야 어쨌든 유쾌한 파격이자 예외임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극락전 왼편으로 돌아가면 몸을 바싹 낮춘 굴뚝 두 개가 앙증맞게 서 있다.

참 소탈하다.

 

절집 뒷문으로 나와 적묵당 맞은편에 서면

화암사의 오종종한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모든 것이 단아하고 담백하다.

 

 

6. 적묵당(寂默堂)

 

적묵당은 두 날개채를 가진 ㄷ자 평면의 승방이다.

별다른 건축적 특징은 없지만 기능성이 퍽 뛰어나다.

안마당 쪽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달아 생활에 편리하도록 했고

뒷마당은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유지하는 공간이다.

 

적묵당 뒷편은 절로 미소가 나올 만큼 아기자기하다.

마당 서편으로 펑퍼짐하게 자연암반이 퍼져 있는데

그 위에 장독대도 있고 산신각도 있다.

 

                   

                    < 장 독 대 >

        장독대는 바닥이 온통 바위이니

대를 쌓고말고 할 것도 없이 암반 그대로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신각>

단칸 맞배집으로

울퉁불퉁한 바위면에 맞추어 길이가 제각각인 네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널벽으로 둘러막았는데 양쪽 박공면에는 풍판까지 달았지만

워낙 집이 작아 꼭 장난감만 같다.

 

흔히 산신각이라면 법당 뒤편 한구석에 있건만

화암사에선 후원에 마련되어 있다.

 

우리네 조상들의 민간신앙이

불교 속에 유입된 모습의 하나가 산신각인데,

 

화암사 산신각은

그게 다시 민간 속으로 환원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글 정리 - 흥선스님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가야산과 덕유산>, 인터넷 카페 퍼온글

사진 참조 - 인터넷 카페 (너도바람님 :  http://jeonggok.org/bbs/zboard.php?id=sanju3&no=741)

  

 

 

 

 

 

출처 : 금강불교
글쓴이 : 황금마삭 원글보기
메모 :

'사찰 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불교회 쌍계사에서  (0) 2009.09.20
금강불교회 관촉사에서  (0) 2009.09.20
봉화 서동리삼층석탑  (0) 2009.07.17
노국공주의 애환이 깃든 청량산 청량사  (0) 2009.07.17
예천 개심사 오층석탑  (0) 2009.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