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역사관

松雪 60年史에 揭載된 나의 寄稿原稿 (송설10회 김창을)

보리숭이 2009. 9. 16. 22:04

松雪 60年史에 揭載된 나의 寄稿原稿
【 이 原稿는 “松雪” 金泉中,高等學校 同窓會 發行, 1,991年度版 松雪 60年史 390頁에 學校側과 總同門會側의 要請에 따라 寄稿原稿로 揭 題되고있는「風雲回顧記」의 全文 이다.】


回顧해 볼대 우리들처럼 不遇와 不幸과 不安한 社會의 環境속에서 來日일을 모른채 生涯를 불살라온 世代도 없을것이다.日本의 植民地 政策으로 우리의 朝鮮은,그야말로 荒敗化 一邊倒로 轉落되어만 가고잇었던 곳이다. 回想해 본다. 朝鮮을 强侵한 倭人들은 內鮮一體라는 아리숭한 口號를 앞세워, 우리들의 民族魂을 짓 밟으면서 自身들의 侵掠戰爭 遂行目的의 充足用으로 農民들이 生産한 農産物은 勿論이요, 甚至於는 家庭에서 使用해오던 ‘놋그륵“등 金屬製品이라면 ”길거리’에 벼러진 古鐵덩이 까지를, 어린 學童들을 動員 收去名目으로 거두어 收奪해 갔다, 뿐만도 아니다.『忍久團練』이라는 口號를 앞세워 學校에서는 추운 겨울철에도 下衣는 ’半바지”에 內衣着用 禁止, 거기에 “양말”도 못신게 하면서, 神社參拜와 國語 <日本語>常用 强要, 그도 모자라 創氏改名까지 하게 하여 民族魂 抹殺 政策으로 까지 나왔다. 그 當時의 일이다. 내가「私立」金泉中學校 入學 當時의 나의 姓名은, 倭式의 姓名인『가내오까 히데마사』[金岡 秀昌]로 改名해야만 하는 쓰라림도 받았다, 그러한 過去를 갖이고있는 나는 世界 第2次 大戰에서 日本 敗亡. 祖國은 찾았으나 이번에는 3,8線을 基準하여,우리의 朝鮮이 南北으로 分斷되고, 6,25 動亂, 4,19 革命, 5,16 軍事 구데타ㅡ,等等의 騷亂으로 國內의 政局은 하루도 便한날이 없이 騷亂속에서 오늘을 살아온 나이기에 내가 이 原稿의題目을 “風雲 回顧記”라 定한理由도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 金泉中學校의 마지막 黑色 校帽 .】

純粹 民族資本으로 設立된 松雪 金泉中學校! 日帝는 侵略根性을 發揮, 朝鮮에 對한 敎育抹殺 抹殺로 朝鮮民族을 無力化하기 爲한 方案으로 倭人들은 新入 中學生들에 對하여 黑色校帽을 國防色으로 바꾸게 하면서, 朝鮮人 校長 <鄭烈謨>도 出校措置하고 “모리자끼‘< 森 崎 >라는 倭人으로 交替시키는等의 蠻行을 저질러 오면서, 그도 모자라 마지막으로는 創校 設立者인 崔 松雪堂 할머니에 對한 財團設立者로서의 資格마져 强奪하기 爲하여, 當時 朝鮮에서는 日帝와 맛서 싸워 오면서도 굳굳하게 成長해온 私學의 名門으로 알려져온 金泉中學校에 對하여 財團貧弱等을 口實로 {私立] 金泉中學校를 {公立] 金泉中學校로 設立條件 變更 措處를 取하고, 그도모자라 朝鮮에서는 名實共히 私學의 名門인 私立中學校로 알려져온 金泉中學校의 創校者인 崔松雪堂 할머니의 創校精神 마저 抹殺시키기 爲하여 校門에 걸려있는 金泉中學校라 標記되고있는 立看板을 撤去하고, 그 자리에 “公立 金泉中學校”라 標記된 立看板을 代替하여 걸었다. 내가 5學年때인 1,941年度 4月 初에 있었던 일이다, 金泉中學校 學生으로서 黑色의 校帽와 校服차림의 學生으로서 勤勞奉仕活動, 軍事訓練等을 苦되게 받아온 마지막 中學生으로서의 生活에 臨해오던 當時의 일이다.

【 나의 中學生 時節의 모습의 이모저모 .】

開學期인 4月 初에 金泉中學校의 校門을 들어서면 視野에 들어오는 아름들이의 “벚꽃나무”가지에매 달려 滿開한 “벛꽃 나무‘의 꽃모습은 실로 感歎할 程道의 華麗한 壯觀이다. 當時의 學制는 4月 1日이 新學年 新學期이며 거기에 2學期,3學期로 分類되고 있었는데, 新入生 歡迎會는 벗꽃이 활짝필 무럽인 4月初에 開催된다. 日人敎師들은 日本語 使用을 强要하면서, 朝鮮語 使用 嚴禁을 노래 불으듯 되푸리 하고 있었다. 그러나 學生들은 訓育敎師의 눈을 避해 日本語 使用을 限死코 履行하지 않는다. 내가 入學할 當時의 學級編成은 學年마다 東組와 西組의 두學級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學生들의 이름은 모두 創氏 改名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그런데도 崔昌坤이라는 學生은 改名하지 않고 姓인 崔를 日語로 ‘사이“라고 불으지 않고, 『다까』라 불으면서 創氏改名에 應하지 않아 日人 敎師들로부터 호되게 시달림을 받아 오고있는等의 일들이 至今까지도 記憶에 生生하다.

 

【 私立 金泉中學校의 廢校 .】
1,942年度의 일로 알고있다, 鄭烈模 校長이 朝鮮 語學會 事件으로 咸興警察署에 投獄되자 기다렸다는듯이 日人들은 校長 後任으로";모리자끼“라는 日人을 앉게하고 敎師들마저 日人들을 大擧 薦擧配置하면서 私立 金泉中學校를 廢校 措置하고 公立 金泉中學校를 誕生시켰다. 1,942年度初에 있었던 일이다.

 

【  거리에 팽개쳐진 金泉公立中學校의 看板 】

오래된 일이라 正確한 日字는 알수없으나 한가지 記憶에 남는 일이 있다. <公立>이라는 글 字가 새겨진 學校 現版이 無條件 마음에 들지 않았다. {松雪}金泉中學校가 公立金泉中學校는 될수는 없는것이고, 松雪堂 할머니의 創校理念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들기에 恒常 마음 한구석에는 不滿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4學年 過程을 履修한 後의 일이라 1,942年 어느날의 일이다. 하루의 修業을 끝마치고 下校길에 있었던 일이다. 學校 正門에 걸려있는 「金泉公立中學校」라고 쓰여진 懸板을 떼어서 보라는듯이 學校正門 앞의 길거리에 팽개쳤다. 至今에 와서 生角해 보아도 大膽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길거리에 나동그러진 學校 看板의 “몰골”을 보고, 그저 快感을 느꼈을 뿐이다. 몇몇 學友들이 그 場面을 보고있었으나. 누가 누구인지? 記憶에 없다. 떨어져 나간 懸板이 걸린 빈 자리에 나는 白墨으로 <長春館>이라고 代身 써 넣고는 悠悠히 사라졌다. 그 자리에 써넣은<長春館>은 當時 金泉 市內에 所在하고잇는 “요리집”의 이름이며 料理집 이름을 써 넣은 理由는 私立을 公立이라 바꾸어 놓흔 行爲는 妓生들의 行爲나 다를게 없다는 뜻에서 였다.

【 看板 破壞事件의 波紋 】

어떠한 徑路를 거쳐 學校側에 이 事件의 眞相이 알려졌는지? 는 알수가 없다. 또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痛快한 일을 敢行하였다는 生角뿐이기 때문이다.崔 松雪堂女史의 創校理念은 民族敎育이란 遠大한 것에 있었을 것이고, 無知는 朝鮮의 獨立과 開明을 妨害하는 行爲인것 같이 여겼기 때문에, “敎育의 힘을 빌려서 한사람이라도 많은 朝鮮의 젊은이들이 獨立鬪士가 될수있도록 人材를 養成하자는데 그 目的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當時의 貨幣 價値로는 엄청나게 큰 金額인 30萬원이라는 私財를喜捨하여 私立 金泉中學校를 設立하신 松雪堂 할머니를 生角해서라도 金泉公立中學校라는 標記의 懸板만은 容納될 수없는 일이라 生角되어 나는 瞬間的이나마 憤怒끝에 地下에 계시는 松雪堂 할머니의 崇高한 敎育理念의 遺志를 올바르게 받들지 못한 後世人들의 力不足에 失意하였을 것이라 生角되어 그 懸板을 때내어 내동댕이 치면서 나는 快哉를 불렀다. 다음날 아침 登校時에는 다시 그 看板이 제 자리로 되돌아 왔지만, 이 事件은 看板을 다시 붙였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思想的인 側面에서 이 事件을 파헤쳐 보려고 金泉警察署 高等係 刑事들의 介入이 있었으며 이번 事件을 契機로 한때 金泉市內가 발칵 뒤집어 지기도했다.

【  事件의 마무리 】

事件調査에 나선 高等係 刑事 谷口(다니구찌)라는 者가 나를 비롯해서 몇몇 學友들을 끌고 가서 威脅的 姿勢로 調査하기 始作하였다. 그들은 校內生活에서 朝鮮語 使用에 對한 理由와 懸板破壞의 主謀者 索出에 熱을 올렸다. 하지만 事前에 謀議 計劃된 事件이 아니고 나 혼자만의 偶發的이고 瞬間的인 感情에서 이루어진 事件인지라 背後가 있을 理가 없었다. 아무리 調査를 한들 새로운 事實이 나타날 까닭이 없었다. 結局 이 事件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擴大되지 않고 事件을 마무리 짓기로 警察, 學校, 學父兄 ,사이에서 合意가 이루어졌다.
(1) 身分이 學生이다.
(2) 年齡이 未成年 者다.
(3) 現在까지 搜査結果로 보아서는 意圖的인 事件이 아니고 偶發的인 事件이다.
(4) 背後가 없다.
(5) 背後를 索出하기 爲하여 事件搜査를 무리한 方向으로 이끌게 되었을 때, 오히려 民族的인 感情을 誘發시킬 憂慮가 있다.
等等의 理由로 事件을 마무리 짓고, 關聯 學生에 對한 處罰問題는 學校側에 맡기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 事件은 一旦 마무리 되었다.

【 關聯學生들에 對한 學校側의 處罰 】

日帝는 戰爭消耗用 人員의 急造 充當策으로 5年制 中學校 課程을 1年間 短縮시켜 4年制로 學制를 變更키로 하면서 이를 그해부터 施行키로 方針을 確定 했다. 따라서 이 해부터 이를 適用 施行케 되어 筆者 學年은 日帝下의 마지막 5年制 中學卒業生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日帝는 그해부터 4年卒業生과 5年卒業生에 對하여 同等한 資格을 附與하기로 方針 確定 하면서 當時 5年 進級의 在學生들에 對해서도 4年生으로 마감하여 社會進出을 해도 無妨하다는 判定이다. 그들은 朝鮮人의 上級學校進學을 마음 속으로 願하지 않았다.이러한 日帝의 꼬임制度에 따라 當時 4年修了生인 都九煥君등은 5年卒業을 기다리지 않고, 4年修了 資格으로 社會에 進出하였다. 學校에서는 懸板事件 關聯者들에 對한 學制變更에 따른 制度上의 方針에 따라 이번 看板事件 關聯 學生들도 4年서 修了生임이 分明함으로 特惠措置를 適用하여 寬大한 處分을 憑藉하면서 人心이라도여 쓰는척 自退토록 結論 지어주었다.. 名分上은 自退形式을 取한 것이나 事實에 있어서는 學校에서 쫓아낸 것이다. 나와 關聯 學友들은 모두 學校에서 쫓겨났다. 이 措置가 金泉公立中學校 懸板破壞事件과 關聯되는 學生들에 對한 最終的인 處罰 形態다..
그 後로 또 歲月이 흘렀다. 이제 母校도 50年을 맞았다. 母校의 無窮한 發展을 祈願하면서 나의 이 回顧記를 끝맺는다.


* 위의 글은 송설의 중학교 과정인 10회를 졸업한 송암 김창을공의 글이며 김창을공은 현재 시한부 생명으로 투병중이라 둘째아들(김중하)인 제가 부친의 회고록 발행을 위해 정리 하던중 김천중학에 대한 내용이 있어 김천중학교의 역사에 참고 자료가 될것 같아 대신 올린글입니다. 김천중학교에 대한 글이 또있어 정리하는대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