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쉼터

해미읍성엔 아픈 아름다움이 있었다.

보리숭이 2009. 4. 24. 12:58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이 대량으로 처형당한 순교성지이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

이곳으로 끌려온 천주교인들은 회화나무에 철사줄로 매달려 고문을 받았으며, 서문 밖 돌다리 위에 자리개질을 쳐서 죽이기도 하였다.

많은 인원을 한줄로 엮어 한꺼번에 생매장 시키거나, 물에 빠뜨려 수장시키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많은 신도들을 죽음으로서 신앙을 지킨 장소여서 1965년부터 성지조성운동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수만명의 성지순례행렬이 이어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순교정지이다.

-해미읍성 자료집에서(서산시)-

 

 

 

 

 

 

 

 

회화나무가 보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