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서산 보원사터를 둘러보고

보리숭이 2009. 4. 21. 21:15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옛 보원사의 창건연대와 소멸시기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다.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와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여기 보원사터는 시유지로 발굴터만 3만평입니다. 25년 발굴, 보수 계획 중 이제 4년이 지났습니다. 99개 이상 암자를 짓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100개의 암자를 짓자 이렇게 무너졌다고 합니다. 탄문스님이 이 보원사로 오시자 1.000명의 스님이 마중을 나갔다는 걸로 보아서 절의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서산일대는 어디든 주차료,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이 절터를 감싸는 가야산은 명당 터로 곳곳에 많은 절이 있었습니다.”-문화재해설사 김재선님이 말씀하신 것을 별꽃님이 기록함.


보원사지당간지주(보물 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102호)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104호)

“여기 가야산에 골골마다 절터가 100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폐허가 된 절터를 어떻게 개발하고 보존해야 하느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내버려 둘 것은 내버려 두고 개발할 것은 개발해야합니다. 보원사터로 오는 길도 자동차로 올 것이 아니라 걸어오도록 하면 이 지방에도 큰 개발 이익이 오리라고 생각해요. 개발이 대세인 요즘에 과연 그런 방향으로 보수가 이루어질 까 걱정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오층석탑을 보세요. 오층이란 석탑은 백제탑의 특징입니다. 신라석탑은 주로 삼층입니다.

지붕돌의 낙수선과 처마선이 모두 위로 살짝 솟은 것도 백제 양식입니다. 처마 받침은 4단입니다. 1층 몸돌 아래 별석으로 굄돌을 받치는 것은 신라 말부터 고려시대 탑의 특징입니다.

 이중기단에 아래층 기단은 사자가 생생하게 조각되었고, 위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이 조각되었는데 그런 조각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입니다. 꼭대기에는 찰주가 남아서 상승감도 있고 안정감도 있는 느낌이 좋은 석탑입니다. 이 오층석탑은 제 생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흥선스님 말씀하신 것을 별꽃님이 기록함..

아래 하단의사자 모습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보물 105호)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보물 106호)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여기 앞에 놓인 부도와 부도비의 주인공은 고려 초기 법인국사 탄문스님입니다.

우리는 탄문스님에 주목해야합니다. 부도는 보통 절의 바깥 한적한 곳에 위치하는데 여기 부도는 절의 중심 영역에서 가깝습니다. 부도는 선종에서 위대한 인격을 기리기 위해서 세웁니다. 그런데 탄문스님은 화엄종 스님입니다. 신라 말의 호족 연합세력으로 세워진 고려가 4대인 광종에 이르면 안정과 질서의 시대로 과거제를 실시하는 문치의 시대가 됩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화엄종이고 탄문스님은 국사가 되니 이런 부도를 경내에 세우게 된 것입니다.

 부도와 부도비는 장대하나 조형적으로 우수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깔린 시대적 사상과 바탕을 이해해야 합니다.”-흥선스님 말씀하신 것을 별꽃님이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