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1정 연수 위문 갔다가 금오산 해운사에 들려

보리숭이 2007. 7. 31. 19:58

7월 31일 오후 구미의 경상북도교원연수원에 들렸다. 연수원 2층에서 김석인선생님과 김동국선생님이 공통사회 1정 연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건강하게 연수를 잘 받고 계신 것 같았다. 수업하는 것보다 이 곳에서 연수받는 것이 더 좋다고 밝게 웃으시는 모습이 부럽다.

 

 

 

연수원을 나오면서 바로 김천 가기가 아깝다며 금오산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였다.

그 유래는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河南省)에 중국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숭산(嵩山)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남숭산이라 명명하였고, 남쪽에 있다 해서 남숭산이라 부른 것이다.

특히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對稱)케 되었다.

고려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남숭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는데, 그 왕자는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해져 호국불교의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였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금오산은 1,000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말하는 것은 이처럼 그 위용(偉容)과 품격이 비범한 데서 기인되었다고 여겨진다.(http://www.geumo.net/에서 퍼옴)

 ‘자연보호 발상지’이라는 기념비가 보인다.

자연보호발상에 관한 안내판은 금오산 중턱 해발 약 400m 지점에 위치한 대혜폭포 바로 아래에 설치돼 있다. 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도착해 쓰레기를 주운 것에서 자연보호 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금오동학

조선 명필인 고산 황기로가 썼다는 초서 금오동학 金烏洞壑(그윽하고 배어난 골짜기)은 각 글자의 크기가 가로, 세로 1m나 된다.

황기로는 중국의 왕희지와 필적되는 초성으로 사임당의 3남 오산 이우의 장인이기도 하며 말년에는 보탄천에 매학정을 짓고 시서화로 생을 마감했다한다. 자연석에 음각으로 금오동학이 새겨져있는데 학자가 약간 나타나 있다.

 구미 시민들이 쌓았다는 21세기의 염원을 담은 돌탑

 

금오산성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한편 성 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성을 쓸쓸이 지키고 있다.(문화재청)

 금오산성 대혜문

 

 

 해운사 안내도

해운사는 안내도에 의하면 신라말 도선국사가 827-898년에 다혈사라고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1925년 철화스님이 해운사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복원하였다. 현존 건물은 1978년부터 1984년까지 7년동안에 걸쳐 현 주지인 성화스님에 의해 신축되었다한다.

 

 

 

 

 대웅전의 벽화- 초전법륜

깨달음을 얻고 난 부처님은 더할 수 없는 행복에 사로잡혔다. 오직 깨끗한 기쁨만이 가득 차올라 49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은 자로서의 완전한 기쁨을 만끽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을 누리는 부처님에게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제대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궁을 나선 것,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왕, 그리고 그를 따르던 무수한 사람들, 깨달으면 이내 찾아와서 그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들….

그리하여 마침내 연꽃 같은 눈을 들어 사방을 천천히 살피며 가장 먼저 이 가르침을 들을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 찾아보았다. 부처님은 성을 나와서 찾아간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 두 수행자를 기억해 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부처님은 다음으로 마지막까지 고행을 함께 하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고행하고 있는 녹야원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녹야원에서 고행하고 있던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다가가자 처음에는 무시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친구여.”

그들이 이렇게 인사를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친구라고 부르지 말라. 나는 부처가 되었다. 나를 세존이라 부르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그들이 현재 닦고 있는 고행이 왜 그릇된 것인가를 지적하기 위해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들이 천천히 눈이 뜨이고 마음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처님은 곧이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사라짐,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들려주셨다. 다섯 명의 수행자 중에서 교진여가 가장 먼저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없애버린 성자(아라한)의 경지에 들어갔다. 곧이어 네 명의 수행자가 차례로 번뇌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나 아라한이 되었다.

 약사여래불

 대웅전

 

 범종각의 목어

 범종각의 법고

 

 자하당

 대혜폭포 밑에서 선생님들과 담소

 수직벽에 떨어지는 물보라가 시원한 대혜폭포

 공원 주차장에서 본 MINI COOPER 차 가격이 1억 2천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