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모음

스승과 제자와의 편지

보리숭이 2006. 4. 24. 22:10

송설32회(고16회) 다음 카페 <좋은 글 좋은 노래>에 있는 글을 퍼 옮깁니다.
 

송설32회 재경동기회에서 2006. 4. 22. 오후 6시 서울 용사의 집에서 전장억선생님을 초청 [추억의 교실수업]이란 모임들 가진바 있습니다. 이 날을 앞 둔 송건수(서울 미림여고 교사)동문의 글과 송건수동문의 선생님께 보낸 편지, 전장억선생님의 답장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전장억 선생님(김천노인대학장, 한학자, 서예가, 83세)께서는 이 날도 재학시절 배운 고전가사 상춘곡을 전부 외우시며 현대적 해석으로 명쾌하게 설명하시고, 직접 친필로 쓰오신 대학의 명언들에 대한 충정어린 교훈은 참석한 송설32회 동기생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교훈을 주셨다고 합니다. 더 상세한 소식과 사진이 올라오면 또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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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생님을 뵈올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오랜동안 찾아뵙지 못한 죄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오구요.

 

2년 전에 식구와 같이 중국 장가계를 여행하던 중

무한의 동정호 기슭에 있는 악양루에 들렀을 때에

우리가 국어 시간에 전장억 선생님께 배운

'악양루에 올라'

라는 두보의 시가 생각난 것은 얼마나 다행한 행운이었는지요.

 

여행을 다녀 온 후 전장억 선생님을 생각하며 편지를 올렸는데

선생님께서 곧바로 답장을 주셨습니다.

 

그 편지 답장을 옆에서 곁눈질 하던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국어선생님이

너무 부럽고 좋다고 하며

우리 학생들에게도 이보다 좋은 교육 자료가 없다고 하고는

전장억 선생님의 허락을 받을 겨를도 없이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지에 올렸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선생님께 올렸던 편지와

선생님의 답신을 감히 여기에 올립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큰 지표가 되어주시고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미림여자고등학교 송 건 수

 

 

선생님전 상서(上書)


엊그제 저녁에 제법 날씨가 서늘하여

바람을 쏘일까 하고 밖에 나가 보았더니

먹장 같은 큰 구름 두 개가 하늘을 덮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려니까 두 구름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틈새로 둥근 달이 환하게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제 한 달 후면,

저 달이 둥글게 한가위에 다시 떠올라

온 누리를 비추겠지요.


구름 사이를 흘러가는 둥근 달을 한참 동안 가만히 쳐다보니

그 속에 계수나무 대신 흘러간 세월이 나타났습니다.

그 한 쪽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34살로 세상을 뜬 제 동생이 있고,

또 그 옆에는 광덕이 형의 얼굴과 함께

선생님의 웃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해마다 5월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우리 선생님

그래서 해마다 편지라도 올려야겠다고 써놓고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일년 내내 책상 설합 속에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방학 때에는

식구와 같이 중국 장가계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지구상에서 산수(山水)의 경치가 가장 빼어나

한 폭의 동양화와 같다는 곳입니다.

서울에서 탄 비행기가 도착한 무한이라는 도시는

상해에서 서쪽 내륙으로 한 시간 가량 비행한 곳으로

춘추전국 시대에는 초(楚)나라 땅이었다고 하는데

그 도시의 한가운데에 장강(長江)이 흐르고

도시 한 켠에는 동정호가 있었습니다.


중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시인들의 글에 등장하는

바로 그 장강과 동정호 !

동정호 옆의 산(산이라야 높은 언덕 같음) 기슭에

붉은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악양루와

장강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천하일품인 5층의 황학루.

이 두 정자가 무한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악양루를 보며 선생님한데 배운 두보(杜甫)의 시가 생각난 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실은 수학보다는 국어를 더 좋아했었습니다.

그 때의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시를 외우지는 못하여 다시 책을 찾아 옮겨봅니다.

  악양루

 


 

   登岳陽樓 (악양루에 올라)

                     두보(杜甫)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

老去有孤舟 (노거유고주)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

 


옛날에(일찍이) 동정호의 장관을 (소문으로만) 듣다가

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랐도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정호의) 동쪽과 남쪽에 각각 펼쳐 있고

(너무 넓어) 하늘과 땅(모든 세상)이 밤낮으로 (이 호수에) 떠 있구나.

가까운 벗이 편지 한 통도 없으니

늙어감에 외롭고 작은 배 한 척에 (인생을) 의지하고 있도다.

(고향이 있는) 관산 북쪽은 아직도 전쟁 중에 있으니

(악양루)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노라.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 배운 이 시를

머리가 희끝희끝한(죄송합니다.) 지금에 다시 보니,

난리에 페허가 된 고향과 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악양루의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는

두보의 애절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코 끝이 찡하였습니다.

우리가 배울 때에는

이 시가 교과서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소개 해 주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시를 가르치시면서

적벽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해주셨지요.


함께 여행하는 우리 일행은 악양루를 지나

장강의 경치를 보려고 황학루(黃鶴樓)로 향하였습니다.


황학루는 방금 지나온 악양루, 강서의 등왕각과 더불어

중국 강남의 3대 명루로 꼽히는 정자이고,

황학루로 올라가는 길 양 옆에는

황학루의 경치를 읊은 수많은 시인의 글과 그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글귀는 초서로 마음껏 멋을 부려 날려 쓴 탓으로

저 같은 까막눈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교실 두 칸쯤 되는 큰 바위에

시 한 수가 새겨져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절필대(切筆臺)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 속에는 이백(李白)이 사용하였다는 큰 붓과 먹, 벼루가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인 즉,

이 시는 중국의 문장 최호(崔顥)의 글로, 동양 최고의 시선이라고 하는 이태백이 여기에 와서 장강의 장엄한 경치를 시로 읊으려고 하다가 최호가 지은 이 시를 보고는

󰡐황악루에서 보는 장강의 이 아름다운 경관을 최호의 시보다 더 잘 지을     자신이 없다.󰡑

하고는 이백이 붓을 꺽었다는 고사가 유명하다고 하였습니다.

최호는 과연 어떤 시를 지었길래 시선인 이태백의 기를 죽인 것일까?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외우고 계실 그 시를

저는 그저 신기한 보물이라도 찾은 양 선생님을 그리며 옮겨봅니다.

황학루에서

 

 


   登黃鶴樓(황학루에 올라)

                  崔顥(최호:?~754)


昔人己乘黃鶴去(석인기승황학거)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복반)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芳草처처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이 땅에는 그저 황학루만 남아 있네.

황학은 한번 날아 가버린 후 다시 올 줄 모르고

흰 구름만 천년 동안 변함없이 떠도네.

맑은 강 저편에는 한양 거리의 나무가 뚜렷하고

꽃다운 풀들은 앵무의 섬에 무성하네.

해 저무니 고향 가는 길은 어디메인가

강 위의 저녁 안개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에 젖게 하네.


저는 이번 여행에서 장가계의 뛰어난 산수의 경치도 경치이려니와

그보다 위의 두 수의 시를 다시 알게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그 글 속에서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 것은 더더욱 좋았습니다.

다녀와서 바로 글을 올린다는 게 또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지난 여름방학 때에 어머니를 모시고

선생님과 같이 산수회(山水會)을 이끌어 가시는 집안 아저씨를 뵙고

선생님의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는 친구 박인기 교수와 서영기 원장과 같이 저녁을 하면서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달포 지나면

또 추석입니다.

좋은 한가위 맞으시고

내내 강령하시고

부족한 저희들이지만

가슴속에는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선비정신이 생생히 살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2004년 8월 31일


                                    제자     송 건 수 올림

 




송군(宋君)에게


편지 잘 받았네.

내 인세(人世)에 뜻을 잃고

사몽비몽(似夢非夢) 그저 멍하니 그날그날을 보내더니

군(君)의 혜서(惠書)를 받고 꿈에서 깨어난 듯

잃어버린 과거(過去)가 불현듯 가슴에 와 닿는구려.


송군(宋君)! 참 고맙네.

잊지 않고 있는 것만도 고마운데

하물며 서신(書信)을 보내 60년 전의 나를 일깨워 주니

내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겠네.


송군(宋君)!

매미가 청림수전(靑林樹顚)에서 시끄러우니

이제 가을인가 보네.

헌창(軒窓)에 더위 물러가서 기쁘고

귀뚜라미는 상하(床下)에서 슬슬(瑟瑟)거리니

온갖 감회(感懷)가 모여드네 그려.

내외간(內外間)이 중국(中國)엘 다녀 오셨다고,

참 좋은 여행(旅行)을 하셨네.

“십구(十九)에 남유강호(男遊江湖)라”고 했는데

이제 인생(人生)이 익어가는 지천명(知天命)의 군(君)이

광견박문(廣見博聞) 혜안(慧眼)을 심화(深化)했으니

장(壯)한 일이 아니겠는가.


박연암(朴燕岩)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불견만리장성(不見萬里長城)하면 불식중국지대(不識中國之大)’라 했지.

우리 나라의 문장(文章)에는 ‘천리강산(千里江山)’은 있어도

‘만리산하(萬里山河)’는 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대륙(大陸)을 직관(直觀)한 군은 실감(實感)하였을 것일세


이청련(李靑蓮)은 「장진주(將進酒)」에서

‘황하지수천상래(黃河之水天上來)’라 하였으니

눈길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원류(源流)는

하늘과 맞닿아 있지 않겠는가.

청련(靑蓮)이 아니고선 이런 표현(表現)은 불가능(不可能)하였을 것일세.

동정호(洞庭湖)의 호대(浩大)함을 전망(展望)한 두소릉(杜小陵)은

‘오초동남절(吳楚東南折) 건곤일야부(乾坤日夜浮)’라 했으니

소릉(小陵)이 아니고서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만약 예사 사람이 이런 표현을 했다면 작대기감이라고 했네.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 시(詩)는

누대시(樓臺詩)의 압축이라고 하지만

여북해서 이태백(李太白)이 황학루(黃鶴樓) 시(詩)를 쓰러 갔다가

이 시(詩)에 억눌려 시(詩)를 쓰지 못하고

봉황대(鳳凰臺)로 갔다고 하지 않는가.

그의 절작(絶作) ‘봉황대(鳳凰臺)’ 시(詩)도

황학루(黃鶴樓) 시(詩)의 모작(模作)이라고 후인(後人)은 평(評)하지 않는가.


송군(宋君)!

내가 왜 군(君)의 편지에서 언급(言及)한 내용(內容)을

여기 되풀이 했겠나.

맹자(孟子)는

‘관어해자(觀於海者)에 난위수(難爲水)요

유어성인지문자(遊於聖人之門者)에 난위언(難爲言)‘

이라 하였네.

인생(人生)의 영고성쇠(榮枯盛衰)란 허무(虛無)한 것

장안(長安)에서 땅땅거리는 호귀(豪貴)한 인물들도 기관(機關)을 용진(用盡)하면 초동목수(樵童牧豎)만도 못하다고 하였네.

학(學)과 더불어 육영(育英)에 참심(憯心)하고

건강(健康)과 가정(家庭)에 최선(最善)을 다하기를 심축(心祝)할 뿐이네.


                2004. 9. 7   全 章 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