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제국 건설 꿈꾼 선화공주
선화공주는
어린 시절 이름이 서동이었던 백제 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과 로맨스로 유명하다. 『삼국유사』는 선화공주를 신라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의 셋째 딸이라고 적고 있다. 서동은 서라벌 아이들에게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가서/서동이를/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를
부르게 시켜 그녀를 서라벌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서동은 먼 지방으로 귀양가는 선화공주의 호위를 자청해 비밀히 정을 통함으로써 노래를 현실로
만든다. 공주가 살 방편을 의논하자며 모후가 준 황금을 내놓자 서동은 자신이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이 흙처럼 쌓여있다고 말한다. 공주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내자고 제안하자 서동은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知命)법사를 통해 하룻밤 사이에 진평왕에게 보낸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진평왕은 서동을 좋아하면서 늘 편지로 안부를 물었는데, 『삼국유사』는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과 백제 무왕은 장인, 사위 사이가 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백제 성왕이 554년 신라 진흥왕에게 전사한 이후 두 나라는 항상적인 전쟁상태였다. 특히 무왕과 진평왕은 다른 어느 왕보다 많은 전쟁을 치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재위 3년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한 것을 비롯해 재위 42년 동안 총 13차례에 걸쳐 신라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데, 주로 무왕이 먼저 공격하는 형태였다. 무왕과 진평왕이 사위,장인 사이였고, 그 결과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동이 누구의 아들인지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최소한 왕위 계승권 내에 있었던 서동이 마장수로 살아야 했던 이유는 당시 백제 왕실이 큰 어려움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29대 법왕과 28대 혜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는데 『삼국사기』는 사인(死因)을 적지 않고 있지만 백제 왕실 내부의 극심한 권력투쟁이 그 원인이다. 『수서(隋書)』 「백제조」는 ‘백제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大姓)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 대성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들이었다. 서울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래 백제 왕실은 토착 호족들의 도전에 시달렸다.
선화공주는 권력투쟁의 와중에 왕궁에서 쫓겨난 서동을 도와 임금으로 만든다. 그런데 선화공주가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녀가 익산지역의 유력한 호족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삼국유사』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일연이 이 로맨스를 기록한 이유는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연기전설(緣起傳說:사찰 창건과 관련이 있는 전설)이기 때문이다.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에 가기 위해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난다.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이곳에 큰절을 지어달라고 말하자 무왕은 미륵삼존 상(像)과 회전(會殿)·탑(塔)·낭무(廊▩)를 각각 세 곳에 세우는데 이것이 미륵사이다.
그런데 근래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폐사(廢寺)터를 대대적으로 발굴한 결과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3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가진 미륵사임이 밝혀졌다. 선화공주와 무왕 앞에 나타난 미륵이 미륵삼존으로서 셋이기 때문에 3개씩을 따로 지은 것이다. 이는 미래불인 미륵이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모두 구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따른 것인데 공주와 무왕은 자신들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주체이자,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뉜 삼국 통일의 주체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곳에 미륵사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지역이 선화공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과거 공주라는 칭호는 국왕의 딸에게만 쓸 수 있는 용어는 아니었다.
선화공주는 익산지역 호족들의 세력을 모아 마장수였던 서동을 국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선화공주는 나아가 익산을 백제의 도읍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비록 즉위에는 성공했지만 무왕은 부여에는 정치기반이 미약했다. 선화공주는 무왕이 갖고 있는 혈통적 정통성과 친정의 세력이 연대해 익산지역에 강력한 왕실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선화공주는 왕권에 도전하는 부여 호족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천도를 단행하려 한 것이다. 천도를 통해 백제를 아주 새로운 강력한 왕국으로 탈바꿈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미륵사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왕궁면의 왕궁평성(王宮坪城:모질메 산성)은 이런 선화공주의 결심이 구체화된 유적이다. 왕궁평성은 부분적인 발굴조사 결과 남북 450여m, 동서 약 230여m의 장방형(長方形) 구획과 궁장(宮墻:궁궐담장)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왕궁의 흔적임을 말해준다. 중국 육조시대의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 “백제 무광왕(武廣王:무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모질메성)로 천도하여 새로운 정사를 운영했다”라는 기록은 이런 유적을 문헌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지금의 익산에 무왕은 별도(別都)를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까지 무왕의 익산천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왕 재위 때는 중국의 수(隋)가 붕괴하고, 당(唐)이 다시 통일제국을 건설한 격변기였다. 중국 통일제국의 수립은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선화공주와 무왕은 강력한 호족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부여 체제로는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익산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미륵사를 왕흥사(王興寺)라고도 하는 것은 미륵사 창건이 왕권 강화의 한 수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화공주의 천도를 통한 왕권강화 계획은 무왕 때 추진되다가 아들 의자왕(義慈王) 때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원자(元子) 의자(義慈)가 태자로 책봉된 때를 무왕 재위 33년 정월이라고 적고 있는데 ‘원자’가 재위 33년에야 태자로 책봉한 것은 지나치게 늦은 것으로서 그의 태자책봉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이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동생을 포함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의자왕이 선화공주의 익산 천도를 비롯한 여러 정책들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의자왕은 선화공주가 지지하는 정치세력과 정적관계였다가 모후가 사망하자 대숙청을 단행하고 익산 천도도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공격하며 강력한 왕권강화책을 펼치던 의자왕은 재위 15년 무렵부터 부여를 중심으로 한 호족세력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게 된다. 이 무렵
대좌평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정책에 반발해 은퇴하고, 좌평 임자는 신라의 김유신과 내통하며, 성충과 흥수 등은 의자왕의 정책에 반발하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이런 내부 분열의 결과 백제는 외부 침략에 쉽게 붕괴했던 것이다. 의자왕은 패망 무렵이 되어서야 선화공주와 무왕이 익산 천도를
단행했던 이유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전북 익산시가 개발한 캐릭터 상품 선화공주와 서동왕자.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 익산에 ‘대왕릉’‘소왕릉’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는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를 두고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굴식 돌방무덤이 있다. 그 중 북쪽에 있는 큰 무덤은 ‘말통대왕릉’ 또는 '대왕릉’으로 불리고, 남쪽의 약간 작은 무덤은 ‘소왕릉’으로 알려져있다. 말통은 서동의 이름인 마동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대왕릉은 무왕의 무덤이고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이 무덤은 고려 충숙왕 13년 왜구의 노략질로 도굴당한 이래 여러 차례 도굴 당했는데, 1917년 일인학자의 발굴 당시 사발형 토기 1점과 나무널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그러나 무덤 형식은 백제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부여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과 같은 판석제 굴식 돌방무덤이다. 이는 7세기 백제의 무덤양식으로서 미륵사지와 왕궁 평성 곁에 묻히고 싶어했던 선화공주와 무왕의 소망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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