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동창

송설22회 전병훈 고려대 명예교수 자현도서관에 본인 수필집 기증

보리숭이 2019. 3. 28. 22:12

3월 28일 송설22회 전병훈 고려대 명예교수님이 본인 수필선집 <그 시절 그 사랑>을 김천중학교 자현도서관에 기증했다. 

수필 중 중고 6년 통학길에 담긴 글을 같이 소개한다.




나의 통학길


  나는 중 ·고등학교 6년간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나의 통학길은 산길과 신작로 두 길이 있다. 산길을 택하여 등교를 하고 신작로 길로 하교하면 우리 집의 삽짝 문은 출발점인 동시에 도착점이다. 우리 집 대문에서 집 뒷길로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 들게 되는가 하면, 신작로 길을 택하면 대문 에서 바로 앞길로 마을 복판을 빠져 나간다. 그래서 하루에 걸어온 길이 하나의 타원형이 된다. 거리로는 등굣길이 10킬로미터, 하굣길은 12킬로미터 정도이다. 산길로 왕복하면 20여 킬로미터이나 신작로로 왕복하면 24킬로미터가 족히 된다. 그래서 약 4킬로미터를 단축하기 위하여 해발 500여 미터의 고개를 넘는 산길이 절대적으로 선호되었다.


  중학교 입학 이전에 이미 왕복 10여 킬로미터가 넘는 초등학교 통학에서 예비 훈련을 쌓았다. 그런데도 중학교 입학 후 처음 한동안은 이 통학길이 내게는 너무 힘에 겨웠다.  물론 타고 나면서 부터 부모를 안심시키기에는 미흡한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단정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3세의 나이에 하루에 24킬로미터 이상을 걷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무리한 과부하인 성 싶다. 그것도 평탄한 길이 아니고 돌과 개울을 지나가는가 하면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 . 몇 가지 뜻하지 않은 건강 상의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우선 나는 격심한 갈증을 겪었다. 등하굣길에 걷는 시간은 각각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너무도 많은 땀을 흘렸다. 그래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산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옹달샘이나 길 갓집 우물이나 펌프장을 그냥 지나친 곳이 없다. 닥치는 대로 물을 마셨다. 이런 나를 보고 나의 한 친구는 내가 큰 병 을 얻은 것 같다며 자기의 부모에게 전하는 바람에 한바탕 동네에 소동이 일기도 했다.


  내가 당시 얼마나 힘에 부치었는가 하는 것은 빚 바랜 중학교 1학년 1학기 성적표가 말해 준다 . 평균 66점, 석차 560명 중 끝에서 10%이내에 겨우 끼어 있다. 나는 이 성적표를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좀 과장된 표현을 하면 '인간 승리의 증표' 쯤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힘겹게 지친 다리를 끌며 늦은 밤 집에 도착하여 때늦은 저녁밥을 먹고 나면 피로와 식곤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잠에 취해 떨어진다. 다음날 아침 5시 등교 독촉에 떨어지지 않는 작은 눈을 부라리며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당시를 회고하면 지금도 새로운 힘이 솟으며 나를 10년쯤은 회춘시킨다. 하여 이것은 훗날 평균 점수의 앞 숫자가 9로 바뀌고 석차에 경쟁자가 없어진 어느 다른 성적표들보다도 내게는 더 값진 것으로 치부 되고 있다. 본래의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습에 대한 나의 의지나 각오가 투영되거나 노력과 땀이 배어들기 전의 나의 본 바탕이다. 아무런 꾸밈도 화장도 없다.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이라 좋다. 공교롭게도 나의 대운 숫자인 6이 쌍을 이루며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힘찬 출발을 한 것으로 이해하면서부터 애정 이 한층 더해 간다.


  나의 통학길! 처음에는 그저 지각하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 달리던 길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는 많은 의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길이란 무엇인가. 점의 연속인가 아니면 시발점과 종착점의 분산인가. 이 산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길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내가 이 길을 넘나드는 동안에 계절은 스물 네 번 바뀌었다. 변하는 철 따라 우둔한 내게도 설익은 철이 들어갔다.


  내가 당시 어린 가슴에 벅찬 숨을 헐떡이며 넘던 그 산길은 옛날 선비들이 장원 급제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달리던 과거 길의 길목이다. 특히 멀리는 삼천포, 진주, 함양 등의 서부 영남에서부터 거창, 합천 등지의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곳의 생원들이 영남의 관문인 추풍령을 넘기 직전에 길을 단축하고자 김천 시내 를 경유하지 않는 지름길이다. 이름하여 '큰국재' 라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나라의 큰 인재가 된다는 뜻인지 국한문 혼용같은 애매한 이름이다. 한양 천릿길에 넘어야 할 고개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직전에 있는 송죽고개와 과곡고개를 넘으면서 설설 준비 운동에 접어 든 다음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 쉬어야 넘을 수 있는 고갯 마루이다. 과거 시험으로 치면 초시 정도는 됨직한 만만찮은 고개이다. 내가 6년간 닳아 없앤 운동화의 양도 적지 않지만 옛 선비들께서 정상에 당도하여 시원한 추풍령 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 마시고 한담 나누며 짚신 꾸러미 깨나 버린 곳이다. 나의 이 통학길은 6년 개근상장 한 장으로 마감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는 영원한 길로 각인되어 있다.


  길 만큼 의미가 다양한 말도 없을 것 같다 . 분명 태초에는 지구상에 길이라는 게 없었다. 누군가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반복적으로 다녀 길이 된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 다니는 곳이 길인가 하면 하면 차, 배, 비행기 등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탈 것들이 지나가며 거치는 시간이나 공간의 과정도 길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일을 해결 하는 방법이나 수단도 길이요, 인생의 여정도, 발전이나 활동의 방향도, 심지어는 방면이나 분야도 길로 표현된다. 이처럼 길은 구체적 추상적으로 다양한 개념으로 쓰이고 함축하는 뜻이 넓고도 깊다. 하나, 길은 태생적으로 부재로 자유로다. 또한 길에는 인공적인 것만 이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길이 무수히 있다. 밤하늘에는 은하수( the Milky Way )가 반짝이고, 바다에는 콜럼버스의 신항로를 따라 무역로( trade route )가 잔가지를 뻗어 가고 있다. 사막에는 낙타의 땀과 대상 들의 탐욕이 스며 있는 비단길( the Silk Road )이 아직도 신비에 감싸여 있는가 하면 섬광을 내뿜으며 달나라, 별나라로 치닫는 무선의 궤도( orbit )는 첨단 과학의 승리이다.


  길, 길, 길 종류도 많고 뜻도 많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길은 나의 산길 통학로요. 오솔길이며 사색의 길이다. 인자요산이라던가, 나와는 너무도 격이 먼 호사스런 명언이다. 어쨌거나 나는 산을 좋아하고, 언덕길, 비탈길, 고갯길, 고생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내게는 제격이다. 여기에는 나의 스승이 있고, 나의 사색의 이삭들이 흩어져 있으며 , 내 꿈이 아롱져 있다.


  나의 체력과 인내심은 통학길에서 담금질되었다. 지겹게만 느껴지던 초기의 어려움도 봄눈 녹듯 지고 나의 약하디 약한 '새 다리'에도 힘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겨울철 늦은 밤길을 혼자 걸으며 내 자신의 그림자에 무수히 놀라고, 제 발자국 소리에 소름 끼치면서 나의 담력은 커갔다. 더위와 추위를 이겨 내고 주린 배를 움켜쥐면서 가난을 곱씹었고 철이 들면서 '나의 길 ( my way ) '이 언뜻 언뜻 보이기도 했다. 나의 통학로는 나를 발견 케 하고,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력과 심성을 길러 준 내 인생의 도량이다.


  나의 통학 길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을 관찰하는 자연 학습장이다. 봄이 채 돌아오기 전부터 뚫어지게 찾던 할미꽃을 정상에 당도하자마자 클태자로 지쳐 쓰러지는 순간 우연히 임자 없는 이름 모를 허물어져가는 묘의 봉분 비탈을 양지라고 의지하며 피어나는 모습으로 마주 칠 때면 의미 모르는 인생의 상념에 사로 잡히고 하잘 것 없는 제비꽃 하나에서도 희열을 느끼곤 했다.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철쭉, 산벚, 찔레꽃, 아카시아, 들국화.... 철 따라 피고 지는 야생화에서는 외로움을 달래고 겸손과 기다림을 배웠다. 운 좋으면 멧새알, 꿩알 줍고 산비둘기와 부엉이 둥지에서 갓 깨어 난 터질 듯 빠알간 엷디 엷은 표피에 쌓인 채 새록새록 숨 쉬는 새끼를 발견하면 생명의 신비에 감탄한다. 추적 추적 궂은 비 내리는 안개 자욱한 날 혼자서 앞만 보고 정신없이 가다가 갑자기 여우나 늑대가 앞을 가로지를 때면 간이 콩알 만 해지고 살무사, 독사 가릴 것 없이 뱀은 볼 때 마다 놀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발에 꼬리 밟힌 긴 뱀이 머리를 사방으로 내 흔들 때는 혼비백산이 된다.


  그래도 그때는 개구리 알이 무논에 둥둥 떠 있고, 개울의 돌을 뒤지면 가재가 두 손가락을 치켜들며 덤벼들던 꿈같은 시절이다. 오동꽃 만개하면 농촌은 못자리 준비가 끝나고 아카시아 향기 짙어지면 농번기는 깊어 간다.(비닐 하우스 농법이 이용 되지 않던 당시는 농사 절후의 진행이 지금보다 좀 더 뎠다.) 풀잎에 영롱한 이슬 맺히면 가을이 찾아 들고 백설이 산야를 뒤덮으면 노루, 토끼가 겨울 산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풀섶 이슬에 나의 바짓가랑이와 운동화는 수난을 겪고 바람맞이 뒤편에 쌓인 깊숙한 눈 속에서는 나의 다리가 방향 감각을 잃고 허우적거린다. 나는 자연을 통하여 순리, 기다림, 너그러음, 정직, 끈기를 배웠다. 자연은 가난한 나의 마음을 언제나 포근히 감싸주고 무한한 평온과 위로를 주었다. 좁은 내 마음은 7, 8월의 뭉게 구름 피어나듯 가없이 넓어지고 나의 정서는 순화되어갔다. 자연은 나의 큰 스승이다.


  내게는 수업 시간 외에는 책을 읽거나 공부할 시간이 없다. 통학 5시간,  수업 10시간, 학습 4시간, 수면 5시간, 하루 24시간 자체가 부족하다. 언제나 시간에 쪼들리게 마련이다. 조급한 마음에 한때 쉬는 시간에 가끔 책을 뒤졌다. 한창 놀기 좋아 하는 친구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한 친구가 우연히 농담 삼아 불러본 것이 명예롭지 못한 나의 별명이 되고 말았다 '공부 벌레!'  좀 지나치고 수모스럽다. 하나 그 순진한 친구의 눈에 비친 실상인 데야 어찌 하랴. 그 이후 쉬는 시간에 책을 보지 않기로 작정했다. 같이 뛰어 놀기로 했다. 대신 시간 계획을 바꾸었다. 하루의 통학 5시간 중 사람도 인적도 없이 깊숙한 산길을 지나가는 하교시간의 일부를 복습에 할애하면서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나는 지금 이라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아쉬움을 지금 자식들에게 농담으로 전한다. " 나도 너희들 같이 잘 먹고 잠만 푹푹 잤더라도 너희들 만큼은 컸을 것"이라고 남들처럼 건강하고 10센티미터 정도 신장이 더 컸으면 하는 희망 사항에서 하는 말이다. 한때 나마 나의 통학길은 나의 공부방 구실을 해 주었다. 잠에 취하여 꾸뻑대는 나의 앞 머리털을 지지직대며 태우는 고약한 노린 냄새나 석유 냄새 풍기는 어둠침침한 호롱불 밑에서보다는 개울물 졸졸 대고 산새 소리 지저귀며, 소쩍새 음악 듣던 그때가 지금의 전파음보다는 훨씬 학습 효과가 높았던 것 같다. 더욱이 학교 수업 외에는 어느 곳, 누구에게서도 지도를 받을 여건이 못 되었다. 오로지 스스로 깨우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생래적으로 내게는 속전속결의 전법이 효험이 없다. 시험 때라고 해서 여분의 시간이 변동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저 조금씩 조금씩 지속적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요, 이것이 나의 학습의 요체이다. 도대체가 나의 학습에서는 자연의 순리 에 따르는 원시적 영농 방법 같은 미련한 길 밖에 통하지 않는다.


  나의 전직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언젠가 내게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 것이 오래 오래 나의 마음 속에 여운을 남긴다. "전형은 보기에는 무척 천성이 까다롭고 엄격한 것 같은데 겪어 보니 의외로 따뜻하고 너그러운 것이 어쩌면 성격 형성과정에서 수양이 잘된 것 같아, " "과찬입니다 " 라며 그냥 일축해 버렸다. 만약 그의 관찰이 옳다면 그것는 전적으로 나의 통학길 덕분이다. 말을 할 기회는 적었으나 많은 것을 반추하며, 자신을 읽고 자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많았으니까, 통학로는 나의 사색의 길이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의 동심과 상상의 나래는 동쪽 하늘 여명과 서쪽 하늘 황혼의 아름다운 노을을 따라 한없이 퍼져 나갔다. 끝없이 끝없이 아침저녁으로 태양만 향하여 걷고 또 걸었다. 나의 통학로는 언제나 나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나는 진작부터 자연을 통하여 미물을 관찰하고 풀리지 않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빈부 귀천, 앎과 무지, 인정과 눈물, 삶과 인생 … 육체는 금전적으로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부자유스러웠으나 마음만은 아무런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나 광활한 대지를 뛰고 창공을 마음껏 날았다. 그런 탓 인지 나는 지금도 대체로 말을 하기보다는 듣거나 생각하는 편을 즐긴다.


  가난은 결코 죄도 수치도 아니다. 빈손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실패 확률 영을 의미 한다. 앞길에는 크든 작든 성공만이 있을 뿐이다. 가난이 용기와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나는 지수 성가 하신 아버지의 생활과 인생 철학 에서 배웠다. 예컨대 나의 중학교 진학은 처음부터 예정에도 없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목표는 초과 달성이다. 나의 인생은 오로지 실패의 부담을 갖지 않는 가난의 위력과 아버지의 의지의 소산이다. “ 자기 일 에 충실 - 여기 지금" 우리 집의 말없는 가훈이다.


  각자가 지금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한 치 앞 을 내다 볼 수 없는 극한 상황의 연속이기에 언제나 계획은 단기 계획 뿐이다. 따라서  "여기 지금"이 당면 과제인 동시에 목표이다.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가훈을 요청하여 '스스로 개척 하자'로 바꾸어 이 뜻을 전해 주었다. 내가 살아 가면서 나의 몫 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한 나의 의지 만이 아니다. 부모에 대한 연민의 정, 부모 인생에 대한 동정심 내지는 대리 보상이 녹아 있다. 돈과 배경( back )만이 난무 하던 당시 내게 주어진 실낱 같은 한 가닥 희망은 '노력과 실력'이라는 것 뿐이었다. 나는 이 지혜 를 오래 통학길을 지나며 자연의 가르침으로부터 터득 했다. 자연은 내 인생의 출발 인 동시에 나의 전부이다.


  나는 자연에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 나의 산길 통학길은 나의 몸과 마음의 도량이며 스승이요, 수행의 길이고 고행의 길이다. 나에게는 영원히 다 갚지 못할 크나큰 빚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