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올리는 것은 직지사 천불전 상량문으로 백수 시인이 2010년에 지은 것입니다.
2016년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니 92세 되시는 던 해에 쓰신 글입니다.
아들인 정준화 교수에 의하면 이 글을 쓰시고 나서 "이제는 이렇게 무거운 글은 더 이상 쓰지 못하겠다."고 하셨답니다.
92세에도 이런 장중한 글을 쓰셨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원본)이라고 표기를 한 것은 홍선 스님이 교정을 한 수정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수 시인의 원본을 읽으면서 웅대한 기품을 느꼈습니다. 역시 천재적인 시인의 글이다 싶습니다.
直指寺 千佛禪院 上樑文 (원본)
아무리 산이 높아도 거기 절이 없어보아라
그것이 산이겠는가 멧새 떠난 빈 둥지이지
한 소절 풍경소리가 그려 주는 山·水·圖.
하늘은 사시사철 무릎 아래 산을 가꾸고
산은 무슨 뜻으로 절을 품에 안았는가
이마에 흰 구름 한 오리 얹고 사는 萬·古·靑.
도교에서는 원래 黃색은 중앙을 의미하는 색이나, 黃岳山은 小白山脈의 중앙산이라는 뜻이고, 直指寺는 그 산자락에 자리잡은 절, 다시 말해서 禪의 上乘從違인 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따온 寺名이다. 해발 1111미터, 黃岳山 直指寺는 新羅 눌지왕 2년(418) 阿道和尙이 創建, 善德女王 14년(645) 慈光律師가 중창하였다 한다. 敬順王 4년(930) 천묵스님이 중창, 고려조에 들어와서 능여대사가 太祖의 도움으로 중창했다고 한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馬韓, 辰韓, 弁韓의 三國時代(기원 전 3,4세기)에는 山岳을 중심으로 民族國家가 형성 되었고, 우리 金泉은 황악산, 추풍령을 중심으로 옥천,영동, 황간, 보은 일부까지가 辰韓의 영토였으며, 우리 金泉은 그 수도였다고 한다. 中國史로 친다면 夏나라, 周나라 시대였다고 한다.
되돌아와 朝鮮朝에 들어서도 東國第一伽藍 黃岳山門 直指寺를 중심으로 발자취를 남긴 高僧大德들, 壬辰倭亂을 겪은 四溟스님을 비롯하여 6.25동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발자취가 얼룩져있기도 하다.
1958년 吳綠園스님이 住持로 재직하면서 직지사는 그 면모를 일신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1966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창불사를 크게 확장하여 오늘의 대 가람을 형성하였다. 현재 직지사에는 쌍탑을 비롯하여,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사명각, 범종각,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요사채, 명월료, 청풍료, 설법전, 제하당, 남월료, 만덕전 등 65동의 전각이 들어서 있다.
禪院의 沿革
寺名인 直指가 선의 본래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直指寺와 禪은 不二的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直指寺에 禪脈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新羅末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직지사를 거치지 않은 스님이 거의 없을 정도로 寺格이 높았었다. 朝鮮時代에 들어와 崇儒抑佛 정책의 암울한 氣流 속에서도 오히려 조정에서 直指寺에 ‘禪宗 大伽藍’이라는 文帖을 내려 비호함으로써 많은 선지식들이 대를 이어 배출 될 수 있었다. 끊일듯하던 法脈을 이은 법계정심 스님이 이곳에서 몸을 숨겼고, 세조 때 학덕겸전의 고승으로 알려진 동곡 학조 스님이 이곳에서 선지를 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구국의 승병장이자 뛰어난 禪僧인 四溟 유정(1544-1610)스님이 이곳으로 출가하여 신묵 스님을 스승으로 주지를 맡기도 했었다.
1910년 직지사 염불회를 修禪社로 개칭, 여름과 겨울 安居時에 5~6명의 芸水가 입방하면서 근대 직지사 禪院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禪宗古刹에 禪院이 없어서는 안되겠다고 하는 역사적 요청에 천불전 옆 千佛庵 염불회를 고쳐 선원을 창설 한 것이다. 동년 10월 西殿으로 선회를 옮겼으며, 1913년 봄에는 中央社宇를 수리하고 선회를 다시 이전했다. 당시 衲子는 3명이었다. 1913년의 봄은 선원의 기틀을 본격적으로 다지는 의미 깊은 해이기도 했다. 그해 당대의 禪僧 霽山스님이 海印寺에서 直指寺로 옮겨와 1929년까지 17년동안 千佛禪院의 조실로 머물면서 선원을 부흥시켜 직지사는 잃었던 영화를 다시 찾는 기틀을 마련했다. 퇴운, 탄옹같은 훌륭한 선사의 출현도 천불선원의 風光을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霽山스님을 종주로 삼고 퇴운스님을 화주로 삼아 비록 暗墨熱惱의 일제치하에서도 선풍을 드날렸던 것이다. 당시 선원은 명월료 자리에 위치했으며, 선원의 이름은 천불선원이었다.
1915년 한국 선의 큰 봉우리인 鏡峰스님이 해인사 堆雪堂에서 修行하다가 직지사로 올 때, 직지사에는 萬峰, 南展스님이 머물고 있었으며, 鏡峰스님은 活句禪을 선양했다. 田岡스님은 1918년 직지사로 와서 선방 납자들과 話頭를 들다가 상기병을 얻어 목에서 피가 나고, 나중에는 피마저 마를 정도로 정진을 감행, 初見性의 깨달음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祝願辭
오늘 이 자리에서 黃岳山 千佛禪院이 上梁式을 올리고 開院을 하면 全土의 눈 푸른 衲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며, 韓國의 선풍이 이곳으로부터 진작 될 것인즉,
山下無盡泉
普供山中侶
各持一瓢來
總得全月去
산기슭에 無窮無盡 솟아나는 바위샘물을,
天地간에 供養드리는 스님네들이
제가끔 표주박 들고 내려와
모두들 보름달 하나씩을 담아가더라.
이 祝願辭를 보탠다.
佛紀 2554年( 2010 ) 八月 十四日(陰 七月 五日)
白水 鄭椀永 和南
'김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천맛집] 쿠우쿠우김천혁신점 (0) | 2017.08.23 |
---|---|
이 땅의 위대한 문화유산, 백수 정완영 시인을 기리는 1주기 직지사 추모 행사 (0) | 2017.08.05 |
직지문인송 2번 째 소개 (0) | 2017.05.12 |
김천옛날솜씨마을, 청암사에서 부항댐까지 (0) | 2017.04.29 |
김천 지례흑돼지 골목 돌아보기 (0) | 2017.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