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감문국 동부연당의 맥문동 - 김천시 개령면 동부2리

보리숭이 2015. 9. 1. 13:30

 

상주의 사벌국, 의성의 조문국처럼 김천 역사의 뿌리도 고대국가다. 바로 감문국이다.

감문국은 김천의 정신이다. 개령면 동부리 마을 앞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동부연당’이다. 동부리는 옛 감문국의 중심인 궁궐이 있은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궁궐에 딸린 궁궐지가 바로 동부연당이라는 게 김천 향토사학자들의 견해다.

동부연당에서 인근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 떨어진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의 밭 가운데에 봉분이 하나 있다. 높이 5m, 지름 10m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무덤이다. 하지만 김천에선 가장 큰 고분이다. 감문국의 시조왕인 ‘금효왕릉’이라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는 현재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나 경작지로 잠식돼 규모가 축소됐고, 일제강점기 이후 수차례 도굴되면서 왕릉이라는 증거도 사실 사라졌다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선 ‘말무덤’이라고 알려졌는데, 여기서 ‘말’은 곧 ‘크다’는 의미로 보아 말무덤은 ‘수장의 무덤’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 동국여지승람에선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또 개령 서부리의 도로변에 위치한 옛 사자사 터 옆에는 경작지로 개간이 돼 봉분의 규모를 식별할 수 없는 무덤도 있다. 감문국 왕비의 능으로 전해지는 ‘장부인릉’이다. 김천 향토지에는 이 무덤에 대해 “일명 장부인릉이라고 하고 일명은 장희릉이라고 하니 감문국 어느 임금님의 궁희(宮姬)였던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감문산 정상부의 감문산성, 감문면 속문산의 속문산성, 감문면 고소산의 고소산성 등도 감문국과 관련이 깊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감문국과 관련이 깊은 흔적들이다. 타 지방의 고대국가들처럼 역사적 근거가 미비하지만 김천 땅에 고대국가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감문국은 어떤 국가였을까?

감문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본기 조분이사금 편에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신라의 감문군으로 삼았다. 때는 조분이사금 2년(231년)이다”라고 적었다. 감문국의 세력과 관련해선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삼한의 큰 나라는 만호, 작은 나라는 수천호”라고 했고, 서거정의 동국통감에는 “큰 나라는 4천~5천호, 작은 나라는 6백~7백호”라고 했다. 감문국은 삼한의 변한계 12소국 중 하나다. 국가의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나 앞서 열거한 감문국 역사 흔적들로 유추컨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 즉 신라는 차례로 주변 소국을 복속한 뒤 영역 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낙동강 서편의 변한 12국을 공략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감문국이 위치한 김천지역이 영남 내륙의 교통 요지이자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거점이어서 일찍이 신라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감문국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서편에 위치해 친가야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신라는 추풍령 너머의 금강 유역 확보와 감문국과 가야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감문국을 집중 공략해 금강과 한강 유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신라는 감문국을 복속시킨 이후 감문군, 감문주, 개령군 등으로 개편하면서 정치·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감문국은 어찌보면 역사적 징검다리이기도 했다.

이종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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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0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