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스크랩] <문화재 취재> 김천 방초정과 모성정

보리숭이 2014. 7. 29. 11:22

 

<문화재 취재> 김천 방초정과 모성정 - 권순진

 

 

 

 

 

 

- 정자의 까닭 

 

 우리 조상들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는 으레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곤 했다.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하류에 내려와 탁족하고 시를 지으며 자연을 노래하였다. ‘亭子’라는 낱말은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이란 뜻이다. 정자는 크게 궁궐·절·향교·서원·주택에 부속된 건물로 짓는 경우와 독립된 단일 건물로 짓는 경우로 나뉜다. 정자의 대부분은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동화하여 자연을 더 자연답게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정자도 많다. 그러나 드물게 연못을 파거나 나무를 심어 인공적으로 조원하는 경우도 있다.

 

 

 

 

 김천에서 청암사 가는 3번국도 길, 구성면 상원리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에 위치한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芳草亭, 도유형문화재 제46호)도 그 가운데 하나다. 1625년(인조3년)에 이정복(李廷馥)이 처음 세웠으나, 1689년(숙종15년) 건물이 퇴락하여 그의 손자 이해가 중건하였다. 참고로 1689년은 장희빈이 왕자를 낳은 해인데, 원자 책봉과정에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처형되고 인현왕후는 폐비되어 흰가마를 타고 비구니 도량인 청암사로 내려온 해이다. 그 후 두어 차례의 화재와 홍수로 멸실된 것을 1788년(정조12년)에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른다. 이의조는 조선 후기 예법을 집대성한 ‘가례증해(家禮增解)의 저자로 현재 그 판목(도유형문화재 제67호)이 방초정 인근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 연못의 전설

 

 그의 호를 딴 방조정이 이정복에 의해 처음 세워질 때는 조상들을 추모하고 선비들이 정담을 나누는 쉼터의 목적이었겠으나, 그와 함께 정자 앞의 연못에 얽혀 전해져오는 애틋한 사연이 더 주목을 끈다. 임진왜란 당시 연안이씨 이정복과 화순최씨 정려부인의 애틋한 사랑과 노비 석이(石伊)의 슬픈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정복과 혼인한 새색시 최씨 부인은 꿈같은 신혼생활을 마치고 막 시댁으로 가는 신행길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문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부산포에 조총을 앞세운 왜병들이 침략해 한양으로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시댁에서도 인편을 통해 난리 통에 위험하니 그냥 친정에 머물러있으라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친정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출가를 했으니 사나 죽으나 시댁 귀신이 되어야 한다며 조용히 딸의 등을 떠밀었다. 17세의 어린 신부 최씨도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기로 결심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몸종과 함께 신행길을 재촉했다. 최씨 부인은 몸을 숨겨가며 40여리 길을 걸어 마침내 시댁 마을 어귀에 당도했다.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돌연 들이닥친 왜병들과 마주쳤다. 뒤 쫒아오는 왜병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할 위기에 처한 최씨 부인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때 부인을 따르던 몸종 석이도 주인을 구하려고 뒤따라 연못에 뛰어들었는데 둘 다 죽고 말았다.

 

 

 

 

- 핏빛 백일홍

 

 사랑하는 신부를 졸지에 잃은 신랑은 부인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웅덩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후손을 봐야한다는 문중의 권유로 훗날 재혼을 하였으나 못 옆에 정자를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먼저 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정자가 방초정이며,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의 연못이라는 의미로 ‘崔氏潭’이라고 명명했다. 그 애틋한 사연이 노비 석이의 기막힌 사연과 함께 전해진다. 당시 최씨 부인을 따라 투신한 석이의 충성심에 감복한 연안이씨 문중에서 석이의 비석을 따로 만들었으나 차마 세우지 못하고 연못에 던져두었는데, 몇 년 전 이 연못에서 비석을 발견하여 전설처럼 떠돌던 노비 이야기가 사실임이 밝혀졌다. 현재 정자 한쪽에 인조가 내린 ‘어필정려문’과 정려각 앞에 ‘忠奴石伊之碑’라는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있어 이곳을 찾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방초정 앞 정방형의 연못에는 자연석 기단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원형 인공 섬이 있다. 어쩌면 정절을 지킨 두 여인의 무덤인양 조성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때는 아니지만 여름이 지날 무렵이면 방초정 앞의 사각 연못에는 더없는 진경이 펼쳐질 것이다. 연못에 가득 떠있는 연두색 개구리밥 위로 인공 섬에 심어진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지면 뜨거운 태양 아래 붉게 물살 무늬를 이루겠는데 그들 혼령의 핏빛인 듯 장열하게 물들 것이다.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입소문을 들은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찾곤 하는데 연못의 정비 이후 오히려 풍경의 질이 떨어진 느낌이 있어 기대하는 사진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다만 수백 년 된 노거수 땅버들의 존재는 고사목과 어우러져 여전히 위엄을 지키고 있다.

 

 

 

 

- 온돌이 있는 이층 정자

 

 방초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2층 다락집으로, 2층 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어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운데 부분에 사이기둥을 세우고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는데, 뒷날 몇 가지 구조물들이 첨가되어 구조상 어색한 점도 없지 않으나 일반정자와는 달리 온돌구조인 것은 방초정의 도드라진 특징이라 하겠다. 추울 때는 1층 아궁이에 불을 넣어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는 사방의 들창문을 모두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탁 트인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특히 여름철엔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전면의 아름다운 연못과 땅버들의 울창한 초록을 훤하게 볼 수 있게끔 하였는데, 방초정의 건물·연못·나무의 배치 등은 조선시대 정원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누마루에 올라서니 짙게 향기로 밴 선비들의 기백이 오롯이 느껴진다. 방초정의 현판은 김대만이 쓴 글씨라고 하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정자에 올라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시가 새겨진 편액이 정자 안에 즐비했다. 우리나라 명승지에 예외 없이 걸린 팔경 현판이 이곳에서도 보인다. 또한 지금은 개방되어 누구라도 이 누각에 오를 수 있지만 옛날엔 여자는 얼씬도 못하게 했고, 같은 연안이씨 일가라 하더라도 지체와 신분이 낮으면 이곳에 쉽게 올라가지 못했다.

 

 

 

 

- 연안 이씨 간 라이벌 의식 

 

 김천시 구성면의 상원리와 상좌원리는 전형적인 산간 취락 마을로 보이지만 양쪽 모두 오백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연안(延安) 이씨 집성촌이다. 연안은 황해도에 위치한 지명이다. 연안이씨 시조인 이무(李茂)는 본래 중국 출신이며 노자(老子)의 후손으로 구전되고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와서 백제와 고구려 평정의 공을 세운 후 신라에 귀화하였다. 무열왕이 신하가 아닌 제후로 봉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주어 창씨 되었다. 구성면에 연안이씨들이 세거하게 된 것은 1451년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李末丁)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낙향하여 지금의 상원리 맞은편 지품(知品)이라 불리는 곳에 은거하면서부터다. 현지에서는 상원리를 ‘원터’라고 부른다. 이후 후손들이 두 마을로 나눠 거주하면서 오랜 기간 인물을 배출해왔고 일가이면서도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처럼 두 마을 간의 선의의 경쟁은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을 배출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한때 노론(상원리)과 남인(상좌원리)으로 갈려 양파 간에 반목한 적도 있었다지만, 상원리에서는 이의조(李宜朝)와 같은 대학자가 나오고, 상좌원리에서는 이장원(李長源)과 같은 큰 효자가 나왔으니, 그야말로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옛말이 영 빈말은 아닌 것이다. 두 마을 간의 인물 배출 경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앞 다투어 항일지사를 배출하였으며, 그들 삶터에 대한 한없는 긍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근현대사에서 배출된 가장 유명하신 분들로 가람 이병기선생과 독립운동가 이동녕선생이 있다.

 

 

 

 

- 상좌원리의 모성정(慕聖亭)

 

 상원리에 방초정이 있다면 상좌원리에는 모성정이 있다. 모성정은 1929년 이현기가 이곳 상좌원 출신 그의 선조 초당(草堂) 이장원(李長源,1560~1649)을 기리기 위해 바위 위에 세운 정자다. 주변에는 비석군과 함께 바위에 음각된 글씨가 여기저기 숱하다. 세운 시기가 근세라 문화재로 지정받지는 못했지만 자연경관은 방초정보다 수려하다. 모성정에서 내려다본 4가지 풍경이 전해진다. ‘물결처럼 보이는 자욱한 안개’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 ‘낮게 드리운 저녁놀’ ‘나뭇가지 흔드는 솔바람’이 그것인데 그 자체로 시 한 수씩이다. 지금은 풍광이 다소 변했겠지만 뒷산과 앞을 흐르는 내, 한가로운 전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초당 이장원은 이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학자이자 효자로 소문난 이장원은 7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옆의 여막에서 기거하며, 3년간 흰죽만 먹으며 시묘를 할 만큼 효성이 지극했고, 또 예절이 어른보다 나았다고 전한다. 가난하였지만 아버지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끊이지 않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아버지를 업고 삼성암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따르며 이들 부자를 호위했다는 전설도 있다.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이장원의 효행에 감동받아 묘역의 소나무가 3년간 잎이 나지 않다가 탈상을 하고서야 잎이 났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효성이 금수와 초목에까지 미쳤다고 탄복하였다.

 

 

 정자안의 현판엔 그가 남긴 충효의 시가 있다. 바위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모성암’이란 글씨는 그의 장손인 이진영이 1697년 ‘屈岩’을 ‘慕聖岩’으로 고쳐 부르고 친필로 새긴 것이다. 모성정은 수차례에 걸친 중건과 이건 과정에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하천변에 위치한 자연 조망형 정자의 대표적 유적으로 뽑히며 둘레의 경치와 잘 어우러져 있다. 건물은 지붕과 기둥 사이에 화려한 단창과 용을 형상화한 조각물을 배치하였으며, 처마 끝 사면에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가미한 팔각지붕 양식이다. 3~4십년 전에는 이곳에서 활을 쏘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전에는 ‘활터’라고도 불렀다.

 

 

 

 

 주마간산으로 보면 도처의 정자가 다 그게 그것 같고, 약간의 운치만을 향유하고 있을 뿐이다. 조상들의 정자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숨결을 느끼려면 정자의 편액에 새겨진 시 한 수 , 바윗돌의 글씨 하나까지 관심을 가져야겠으나, 그건 어려울 것이고 적어도 그 속뜻을 새겨듣는 노력만은 게을리 말아야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상들의 깊고 그윽한 감성과 지혜에 어찌 미치고 이를 수 있으랴.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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