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봉계 율수재 초여름

보리숭이 2014. 5. 11. 21:03

김천 율수재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769번지 봉계마을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극락산 동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성종-연산군 시대에 살았던 조위曺偉라는 분의 생가터에 세운 재실齋室이다

조위는 이 곳 출신인데 알기 쉽게 설명하면 김종직의 손아래 처남이다. 당연히 김종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천 율수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기와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4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은 온돌방 1칸과 마루 1칸, 오른쪽은 2칸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처마 밑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친필로 ‘매계구거(梅溪舊居)’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율수재의 도덕문(道德門)은 1707년(숙종34) 매계선생이 죽은지 204년만에 나라에서 문장(文莊)이라 시호(諡號)가 내려 그 기념으로 세운 대문인데 시법(諡法)에는 도덕 박문으로 인하여 문(文)이라 하고, 행함이 바르고 뜻함이 온화하므로 인하여 장(莊)이라 하여 <道德博文曰文, 履志和曰莊>으로 도덕문이라 이름했다.

 

가산의 몰수로 남긴 것이 없지만 문집 34권이 직지사에 소장되었다가 없어지고 1718년에 매계문집이 발간되었고, 1745년에 중간된 것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두보의 시를 우리 말로 풀이한 <두씨언해>라는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두씨언해는 꽤나 유명한 책이다

조위의 신세는 성종이 죽고 그의 아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연산군은 자기가 멋대로 노는 것에 대하여 딴지를 거는 올곧은 신하들이 미웠다

그래서 유자광 등이 꼬드기는 대로 사관史官 김일손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종직이 사초史草로 올린 것을 트집잡아 사림파 신하들을 조정에서 쓸어내라고 명한다. 이를 이름하여 무오사화라고 한다

의제는 중국에서 숙부에 의하여 축출당한 임금인데 그를 조문弔問한다는 것은 자신의 증조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종직의 일파인 조위는 연산군의 명으로 중국에 사절로 다녀 오다가 바로 잡혀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순천으로 귀양간다. 그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네

잘 나가던 선비가 하루 아침에 급전직하하였으니 그 울분이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는데 자료를 찾아 읽어보았다

 

....험한 물결 한 가운데 백 척 장대에 올랐더니 무단히 회오리바람이 벼슬(宦海)에 내리는 바람에 억만 길 못에 빠져 하늘 땅을 모르겠다...

죽고 살기가 命에 달린 것이고 공자님도 厄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군자도 억울하게 갇힌 바 있었으니 어이하겠는가...

 

온통 하소연 뿐이다.

조위는 순천에서 같이 유배를 온 김굉필과 서로 만나 위로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49세로 화병으로 죽는다. 그러나 조위는 이 때 죽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듬해 연산군이 사림파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자신의 생모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다시 사림파에 대한 학살을 명하는 바람에 김굉필은 목이 잘리고 조위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게 된다

두 사람은 나중에 명예회복을 하게 되지만 이미 죽고 난 이후였다 

 

1980년부터
김천문화원에서 조위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고 학생들에게 계승 발전을 시키고자 매년 경상북도 단위 행사로 김천 율수재에서 매계백일장(梅溪白日場)을 개최하고 있다. 1989년 12월 문화공보부에서 조위의 생가 유허지임을 표시하는 표석 와비(標石 臥碑)를 세웠다.

 

앞뜰에는 연못이 있고 뒤쪽에는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입구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김천 율수재는 현재 창녕 조씨(昌寧曺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2008년 9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