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역사관

여성의 사회 참여와 최송설당의 육영사업-송설40 김창겸

보리숭이 2013. 7. 10. 10:38

한국도 여성이 인구 절반의 시대가 되었다. 남성중심사회가 남녀균등사회로 바뀌었다. 더불어 여성의 사회참여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대한민국을 이끌다'는 주제로 2013년 여성주간 기념 특별기획전이 지난 3일 개막해 10월까지 서울 동작구의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개최된다. 역사 속 여성들이 각 지역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회참여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루었음을 알린다는 취지에서 각 지역별 대표 여성을 선정하여 관련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15명의 자료가 전시되었는데, 잘 알려진 신사임당 같은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종전에 그만큼 여성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음에 있다. 전시된 여성에 최송설당이란 분이 있다.

 

최송설당은 홍경래 난으로 멸문당한 집안 후손으로 1855년 김천에서 태어나 어렵게 생활하다가, 동학란을 피해 상경했다. 1897년 엄상궁이 영친왕을 낳자 덕수궁으로 입궐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다. 그러나 1907년 9월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일제의 강요로 영친왕은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로써 송설당은 '영친왕 보모'라는 직책이 없어졌다. 궁에서 나온 뒤 1912년 서울 무교동에 '송설당'이라는 큰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곳곳에 많은 의연금을 내놓았다.

 

최송설당은 일찍부터 많은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희사했다. 1926년 신문에는 '송설당이 평소 소작인들에게 너그러웠고, 그래서 친부모와 다름없이 칭송을 받았으며', '남자도 아닌 여자'가 72세 고령에, 또 "재산 전부를 사회적 사업에 투입하기로 결심하고 고아원 혹은 유치원을 설립하여 부모 없고 가엾은 아이들을 교양하기 위해 늙은 몸을 바치고 가진 물질을 희생한다"는 계획을 담은 기사가 있다.

 

최송설당은 1930년 2월 당시 엄청난 거금 총 30여만원 전 재산을 '김천고보' 설립을 위해 희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이에 반대하였다. 이유는 일제는 인문계 학교 증설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에 따라 김천고보 설립신청에 대해 상업이나 농업학교, 즉 실업학교로 방향을 잡으라고 요구하였다.

 

송설당은 총독부에 강경하게 맞섰다. 인문계 고등보통학교가 아니라 실업계 학교라면, 아예 기부 사실 자체를 취소하겠다고 배수진을 치면서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민족을 살려낼 인재를 양성하자면 인문계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녀의 확고부동한 생각이었다. 결국 총독부는 1930년 10월에 김천고보 설립을 허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고, 1931년 1월 고등보통학교 규정 일부를 개정하여 인문계 학교에 실업과목을 교과과정에 첨가하였다.

 

마침내 1931년 2월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인가를 받았다. 3월 김천고보 설립이 총독부에 의해 정식 승인되었다. 한 푼도 남겨두지 않고 전 재산을 투입하겠다는 결연한 송설당의 의지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래서 뒷날 "최여사는 조선여성사 또한 조선문화사의 1항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최송설당이 만 80세가 된 1935년 열린 동상제막식에 송진우·여운형·방응모·백남훈·최규동·이인 등 유력 인사를 비롯해 각지에서 1천여명이 참석하였다. 언론은 뉴스와 논설로 그녀의 업적을 찬양하고, 동상제막은 "사회를 위한 헌신적 실행인으로서의 활교훈의 씸볼로 볼 것"이며, 최송설당을 본받은 제3의 교육투자가를 기다린다며 독려하고 나섰다. 송설당의 행적을 교훈삼아 '확대재생산'하라는 주문이었다.

 

최송설당의 삶에는 두 번의 큰 전기가 있다. 하나는 늦었다고 느껴지는 만 41세에 상경하여 돌파구를 열어나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 75세에 김천고보 설립을 실행한 것이다. 그는 전근대사회에서 태어나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살면서 사회참여를 적극 실천한 여성이다. 여성이라는 처지와 불우한 집안출신이라는 한계를 깨쳐 나갔으며, 시대적 장벽을 넘어서 모은 전 재산을 민족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투자한 것은 한국 근대 여성사에 기록되어 빛날 일이다.

 

앞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는 많으며 클 것이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나가고 또 제도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어떠한 삶이 진정한 사회참여인지는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겠다.

 

 

 /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송설40회) 경인일보 2013.07.08 기사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