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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해 한용운 진영 제작기 화가 김현철 작품 < 1월10일 >

보리숭이 2012. 3. 10. 14:06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귀신을 그리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을 그리는 일이다" 

이것은 그 잘잘못을 가릴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귀신그림에 비해 사람의 초상은 무엇보다도 '전신'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그리기가 만만치 않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신(傳神)'이란 초상화를 그릴 때 외모의 형사뿐만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사생해 낸다는 의미이다.

 

 

 

만해 한용운 진영 제작기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은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 운동가이다. 이렇듯 그의 족적이 역사에 뚜렷이 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만해의 얼굴상은 오래 전 조선일보에 게재된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된 이미지(사진2)가 전부이다시피 하다.

 


이 사진 이미지를 근거로 후일 여러 작가들에 의해 평면(회화)과 입체(조각)로 그의 모습이 재현되어 현재 심우장, 만해마을, 백담사, 만해생가 등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다.
금번, 만해 한용운의 진영을 전통초상화 제작방법인 전신(傳神)기법으로 제작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동안 세간에 덜 알려진 몇 장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3은 만해가 1919년(41세)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한 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촬영한 사진이며, 사진4는 1929년(50세) 12월 광주학생운동을 알리는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 찍은 정면, 측면 사진이다.
2장의 수형 기록표 카드에 붙어 있는 사진 속의 만해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다소 불안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은 사진5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만해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만해는 출가 후, 1911년(33세)에 동북 삼성을 주유하면서 독립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본 첩자로 오해를 받는다. 이때 독립군 청년에게 피격을 당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총알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목 부분 총상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은 만해가 이후의 삶 동안 유지해 온 실재적인 신체 자세였다. 이는 곧 독립 운동가로써 최후까지 변절하지 않은 그의 저항정신과 승려로써 일본이 그들의 불교와 조선의 불교를 통합하려 한 행위를 규탄하고 저지하며 조선의 불교를 지키고 바로 세운 그의 활발한 불교 활동 등을 대변할 만한 상징적인 자세로 여겨졌다.
이에 만해 한용운 진영을 제작함에 있어 다소 비뚤어진 자세와 형형한 눈빛을 취하여 그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상징적을 표현하려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초상화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보이듯 화면의 중심에 얼굴을 포치하여 그의 등등한 기세가 보다 잘 드러나게 했으며, 또한 그는 비록 승려 신분이기는 하나 독립 운동가로 세간에 더 알려져 있는바 승복보다는 당시의 흰색 두루마기 형태의 의습을 갖춰 신체표현은 그 형과 색을 최대한 절제하여 그렸다.


 

이러한 제작 의도로 만해의 실재 외모뿐 아니라 내재된 그의 정신까지 사생해 내고자 심혈을 기울였으나, 혹여 이 초상이 만해를 왜곡하는 또 다른 이미지의 상(像)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2010.10
금릉 김현철

www.hyunchulkim.com

 

 

 

 

출처 : 이안삼카페
글쓴이 : 이안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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