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안경너머로 전하는 따뜻한 세상의 노래-작곡가 이안삼

보리숭이 2010. 1. 31. 21:30

인물 탐방

 

안경너머로 전하는

따뜻한 세상의 노래

 

작곡가 이 안삼 

글 김광한(작가. 문학평론가)

그의 삶속에서 항상 손을 잡고 이끌어준

스승은 김동진 선생이었다.

대학시절에 만나 스승을 따라 그 정신을 습득한

이안삼,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지금,가곡으로

우리 민족에게 애련한 정과 아름다움을 심어주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 이안삼


 고승(高僧)이 열반(涅槃)을 하면 사리(舍利)가 남고 시인이 죽으면 그가 생전에 고뇌하면서 기쁨으로 쓴 시(詩)가 남는다.작곡가가 세상에서 물러나면 그가 생전에 작곡한 아름다운 노래가 성악가를 달리하면서 대중속에 멜로디로 남는다.노래나 시, 그리고 도(道)라는 것은 형체는 없어도 사람의 가슴안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보아서 쓰다 버리는 물건과는 달리 영구적인 특성이 있다.

작곡가 이안삼 선생을 알게된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숱많은 백발의 노신사라는 것이 첫 인상이었지만 세월을 어느 정도 경험해보고 한 분야에서 평생을 바쳤다는 것과 자라온 환경과 하는일은 서로 달랐지만 비슷한 연대에 세상에 아직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친근한 그 무엇이 있었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몇차례의 음악회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그 뒷모습에서 필자는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의 모습을 얼핏 느껴볼 수가 있었다. 부드러운 손놀림과 마치 수양버들이 미풍에 흔들리는 섬세한 동작에서 그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그가 작곡한 곡을 부르는 성악가와 연주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내는지 능히 알수가 있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알지만 그 노래를 작곡한 당사자는 거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대중가요의 곡을 작곡한 것도 아니고 순수한 우리의 가곡을 작곡하면서 보낸 지난 세월에 비해 그가 받는 대접이 조금은 소홀치 않나 싶은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현존하는 작곡가의 이름이 대중속에 회자(膾炙)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생 수많은 곡을 작곡했지만  예술가의 자존심은 명예와 직위와 부(富)를 그냥 스쳐왔기에 오히려 더 많은 존경을 받는 작곡가가 이안삼이다.그의 간단한 이력과 수상경력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 나고야 출생. 1961년 김천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다. 1966년부터 1980년까지 마산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82년 미국 브루클린음대 작곡과를 졸업하였고, 줄리어드음악원 지휘과를 수료했다. 김천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작곡가회, 한국저작권협회, 한국음악협회 회원, 한국성가협회 창작분과위원, 국제교육음악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목록   
<일터로 가세>(1976)

<바이올린 소나타>(1986)
<내일의 소망>(1993)
<조국>(1997)
<멀고먼 나라>(1998)    
   
  수상   
1982년 김천시문화상(예술부문)

1993년 경북문화상(공연예술 부문)  

작곡가 이안삼은 170곡의 가곡을 작곡했으며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내 맘의 강물'의 이수인, '강 건너 봄이 오듯'의 임긍수 등 3명과 함께 뜻을모아 지난 2003년 가곡 활성화를 위한 '4인 작곡가회'를 결성, 가곡집 발간 등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것은 곧 '제1회 대한민국 가곡제'의 산파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대중음악이 나날이 발전하는 동안 가곡은 제자리에 머물면서 향수를 달래는 중년층만 취미로 즐기고 있는게 현실이 아쉽습니다.대중음악이란 대중들이 세월을 지나면서 느끼는 욕구와 정서가 달라지면 곧 잊혀지게 되지만 가곡이란 그런것이 아닙니다.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친근한 곡은 변함없이 사랑을 받는 것이 가곡이지요. ".

이안삼은 가곡에 대한 나름대로의 좋은 점을 강조한다.물론 모든 곡은 그것이 일시적인 대중의 취향에 맞아 떨어져서 유행이 되는 것도 좋지만 변할 수 없는 한국적인 정서와 애잔한 원천적인 그리움에는  미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다.

작곡가 김동진 선생과의 인연  

이안삼은 1961년 김천에서 상경,서라벌 예대 기악과에 입학을 했다. 김동진 선생은 그 학교에서 화성학(和聲學)을 지도 했다. 그가 1학기 말쯤 문득 김동진 선생이 그를 불렀다. 이유는 기악과에서 작곡과로 전과(轉科)를 하라는 것이다. 그 한마디에 그는 기악과에서 작곡과로 전과를 했다. 그리고 얼마후 김동진 선생은 경희대로 갔다. 그 역시 스승을 따라서 경희대 작곡과로 갔다.

"선생님은 제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물론, 우스개 소리도 하지 않았어요. 저 역시 그분을 스승으로 여겨서인지 함부로 질문도 하지 못했어요.그만큼 당시에는 교수와 제자 사이에는 엄격한 법도가 있었습니다."

김동진 작곡가하면 우리나라에서 불리워지는 가곡은 거의가 싶을 정도로 많은 작곡을 햇고 유명세도 엄청났으나 그가 곁에서 지켜본 선생의 모습은 참으로 검소하면서 서민적인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이안삼이 스승을 보는 것은 스승의 내면의 모습이 아니라 외관상 접하는 의복과 신발같은 것들이었다.그런데 그것들이 명성에 비해 너무나도 동떨어져있다는 것이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오래신은 구두와 계절에 따라 바뀌는 신사복 정장 한벌, 그러나 스승이 작곡하는 음악은 달랐다.거기에는 변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민족의 정서와 힘이 되는 동력이 잠재되어 있었다. 음악가다운 외형보다 내적인 것에 더 힘을 실어주는 모습은 훗날 이안삼에게 큰 교훈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당시 경희대 음대에는 이흥렬, 김대현, 이승학 교수 네 분이 주요과목을 담당했었다. 모든분들이 내노라하는 한국의 음악천재들이었다.여름 장마철에도, 햇볕이 나는 날에도 스승은 당시 유행하던 짧은 장화를 그대로 신고 지냈다. 이안삼은 속으로 아무리 유명한 작곡가라도 저렇게 가난하게 사는구나 하면서 예술의 어려움을 실감했으나 막상 스승의 집에 가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검소함이 몸에 배어서 그런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한때 시골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다가 1980년 미국 뉴요크로 떠났다.귀국해서는 복직을 했고 그 이후부터 많은 작곡을 하게 되었다.

스승의 후광아래에서

 

제 3회 작곡발표회가 서울 영산 아트홀에서 열렸다. 2000년도의 일이다. 이때 이안삼은 스승을 모시고 공연을 가졌다. 그가 스승인 김동진 선생에게 전화하자 스승은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금세 기억을 했다. 그리고 흔쾌히 허락을 했다. 실로 3~40년의 만남이었다. 이후부터 그가 이끌어가는 단체활동에는 언제나 참석해주었다. 그는 가곡의 활성화를 기하기 위해 여러 단체를 만들었거나 참가했다.

그가 처음 만든 단체가  "한국예술가곡 연합회"였고 그후 "한국 100인 창작 연합회" "포럼 우리 시 우리 음악"등 세단체를 창립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작곡을 하게 되면 시를 짓는 시인이 있어야하고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또한 있어야한다. 그때에도 스승은 어김없이 당신의 작품을 내 놓았으며 격려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 이미 스승은 인간한계의 나이를 훌쩍 넘어 90이 되어있었다.

"그래 잘했다. 더 열심히 하라!"

김동진 선생은 90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이안삼의 곁을 충실히 지켜주었다. 기력이 쇠약해져서 직접적인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찾아가면 보청기를 끼고서 경청을 하고나서 자문을 해주었다. 그리고 대견하다는듯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김동진 선생은 이안삼의 인생 전체라고 할 수 있는 청년기와 노년기를 거치면서 시대와 작품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작년 2009년에 96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타계한 스승 김동진 선생에 대해 그는 잊지 못할 몇가지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남들은 모를 스승의 일화이면서 한국의 대 작곡가에 대한 추억으로 음악사에 기리 남게 될 것들인지도 모른다.


스승에 대한 추억 몇가지

그 몇가지를 살펴보면 이래와 같다.   

*90세 되던 해 서초구민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선생님 이번 MBC 가곡제에 선곡된 작품을 알려 드렸더니 짜증 내셨다.

  아니 이 봐!

  MBC 가곡제는 왜 해마다 내 작품을 넣는지 모르겠어?

  젊은 작곡가 많은데 새로운 작품 알리려 들지 않고 왜 내 작품을 자꾸만 연주하는지 모르겠어! 

*작곡단체 기획 사업으로 해마다 신작 작품 선곡 및 출연료 예산을 보구선

  이게 왜 이렇게 많은 출연료를 성악가에게 지불하느냐?

  가난한 시인 작곡가들이 돈을 내어 공연하는데 무슨

  출연료를 준다는게야!  예술가들이 무슨 돈이 있어! 작곡가 작품은

  그냥 돕는게 맞지 않은가?

 

*한국예술가곡 연합회 회의 마친 겨울 밤 9시 넘은 캄캄한 밤 귀가 길 스승께 택시로 모실려고 차를 세웠다.

  이것 봐! 왜들 차를 잡고 그래? 나는 혼자 갈 수 있어, 타지 않겠어, 전철 타겠어! 

  몇 분간 설득하다 결국 뿌리치고 전철 타고 귀가.

* 포럼.우리시우리음악 회의 후 나를 불러 '선물 하나 하겠네', 받아본즉 스승께서 60세쯤 녹음하신

  음반 한 장 받았다. 직접 노래하셨다며 건넨 음반.

  감상 후 놀라운 가창력 새로운 작품 발견.

* 평소 의복은 30 여년 전 입으셨던 오바코트, 퇴색된 낡은

  오리털 잠바 즐겨 입음.

* 소식가로 음식 남으면 강아지 먹인다며 비닐 봉지에 넣어 귀가.

* 선생님, 가고파 원본 갖고 계십니까?  대답 않음.

*회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스승께선 발언한 적 10 여 년간 없음.

* 한 평생 술, 담배 하지 않음.

* 바이올린 연주력 뛰어나다는 입소문 들었으나 제자 앞 연주한 적 없음.

* 학교(경희대) 렛슨하다 피아노 음정이 정밀하지 않으면 손수 조율 사용.

* 창 달린 운동모 즐겨 씀. 수 년간 새탁 사용해 창이 우거러짐.

* 회의 참석시 사모님께서 돈 많이 소지하면 위험하다며

   언제나 1만원만 주심.

* 94세 되던 해 모처럼 축사를 부탁 드렸더니 20 여 분간 꼿꼿한 자세로 한국 가곡발전과 방향을 제시하므로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

 

작품성향

*서정적이며 낭만, 희망의 메시지 담고 있으며 고향, 그리움 배인 선율 짙게 내려져 있음.

*민족적이며 고전적 내용 담긴 소재로 접근, 확대하며 근대 음악기법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현대 음악, 조성없는 무조 기피, 전통 화성학에 기초 둔 민족주의 음악 지향.

*가곡: 자유시를 즐겨 쓰며 형식 구애 받지 않고 작품 중 조성 변화 즐겨 사용.

*이은상 시인의 작품을 즐겨 사용, 홍난파 이후 근대 가곡사에 거목으로 96세 마감하시다.

 

대표작

가곡 : 가고파, 목련화, 수선화를 비롯하여 수 백 곡 작품 남김.

국민가곡: 조국찬가, 봄이오면, 기타.

군가 : 육군가 비롯 많은 작품 남김.

        김동진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 추정 : 2007년 10월 이후재 시인(전: KBS 아나운서) 작품.

*경희대 음대 학장. 예술원 회원. 포럼우리시우리음악 고문.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로 선정됨 / 음악가가 뽑은 한국 최고의 작곡가로 선정됨.

*향년 96세 일기로 2009년 7월 31일 오전 1시 20분 노환으로 서거.

 

내 마음 깊은 그곳에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버린 그대여
내 마음 먹구름 되어
내 마음 비구름 되어
작은 가슴 적시면 흘러내리네
아~~ 아~~
오늘도 그날처럼 비는 내리고
내 눈물 빗물되어
강물되어 흐르네

2000년 5월에 시인 김명희가 시를 쓰고 이안삼이 곡을 만들어서 그해 10월 6일 "이안삼 가곡의 밤"이란 명제로 영산 아트홀에서 초연되었는데 당시 청중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어렵지 않으면서 쉽고도 간결한 가사, 마치 물흐르듯이 이어지는 문장의 유려함, 그 안에 내재된 애잔하고도 서러우면서 그리운 메시지는 듣는이로 하여금 마음의 고향속에서 정다운 사람이 손짓하는 소리를 듣는 것같았다. 그리고 그 시에 곡을 붙인 이안삼, 그것은 일찌기 그의 스승인 김동진이 이은상의 시를 받아 곡을 붙인 가고파와 같이 좌우익(左右翼)이 결합이 돠어 지금 힘차게 하늘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첫무대에 올려질 때 율 쳄버오케스트라 협연으로 공연실황을 Bella Music에서 음반 제작하였으며, 당일 첫 발표회 때 청중들의 많은 환호를 받았다.이 작품은 당해 조선일보사 주최 제11회 한국가곡제에 출품되어 2000년 11월 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테너 박세원에 의해 공연되었다.
이후, 2001-2002. 제30•31회 MBC가곡제 출품, 의 시그널 음악, 2003년 KBS 가곡제 공연 등 활발하게 작품이 알려지고 있으며, 음반으로도 현재 5종이 나와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의 시는 김명희에 의해 쓰여졌고, 이 작품은 여성3부 합창으로도 편곡이 되고, 혼성4부 합창 등으로도 편곡되었다.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어 연주할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아름다운 노래말과 곡은 시비로 제작이 되어서 지금 보령 시비공원에 영구 전시 되고 있다. 

 

 노래와 작곡 시비.보령개화예술공원

김현욱 박사,이혜자 선생님.전세원 시인, 오문옥 시인

 

 존경받는 우리 시대의 작곡가

 

젊어서는 정렬과 작품이 덕목일 수 있으나 그것들을 빛내기 위해서는 인격과 함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어야한다.작곡가 이안삼을 알고 있는 수많은 성악가와 후배 작곡가, 그리고 시인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그가 얼마나  겸허하면서 도덕적인 양심의 소유자인가를 증언해준다.백발은 존경의 면류관이라는 말도 있듯이 작곡을 하기 위해서는 한시도 사랑의 감정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얼핏 안경을 낀 그의 얼굴이 다소 딱딱하게 보일런지 모르나 안경안쪽의 눈은 항상 정겹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든지 들어줄만한 넉넉함의 빛깔을 띠고 있다.인생의 후반부에 더욱 바빠지고 있는 작곡가 이안삼, 그가 만든 "이안삼 카페"에는 음악과 무관한 많은 회원들이 가입해 있고 수많은 글들이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 역시 음악인이지만 다른 분야의 장르에도 기꺼히 참석, 시를 쓰고 컬럼을 쓰고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과 허심탄회한 교류를 즐기고 있다. 작곡이란 사랑의 감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산물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가곡도 그렇다.

"모든 노래가 그렇지만 특히 가곡의 경우,부르면 마음이 아늑해지고 악착같은 마음이 없어져요.그리고 요서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음안에 아름다움이 자리잡으니까 이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있습니까?" 

하면서 웃는 모습에서 훗날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마음이 황량한자에게 맑은 샘물이 되어주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주는 활력소가 되어주면서 불리어질 것을 믿어본다.

 

다문화 가곡축제 영등포 아트홀에서

 

글 김광한

중앙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 졸업(69년)

월간 아리랑 여원 편집국장

한국문인협회회원

로만칼라. 소설 윤유일 백두대간 등 28권 창작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