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흥선스님과 같이한 미륵사지

보리숭이 2009. 7. 7. 19:27

 

유물관 옆 미륵사터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스님 설명을 들었다.

“미륵사터 탑 뒤로 보이는 산이 용화산입니다. 용화산 남쪽의 너른 터에 미륵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륵사 창건은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잘 나와있습니다.

마를 캐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 되어 신라 신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을 합니다.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던 도중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선화공주의 간청으로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미륵사는 1980년부터 발굴하고 있습니다. 발굴 결과 미륵사터가 늪지대이며 3개의 금당과 3개의 탑이 있는 삼원일가람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미륵부처님이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삼국유사 내용과 일치합니다.

2009년 1월 14일, 미륵사 서탑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어요.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륵사 탑이 3개인데 중간인 목탑지는 아직 사리장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왕이 왕비를 몇 명이나 두었는지 알 수 없기에 선화공주와 무왕의 이야기를 허구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미륵사 목탑과 금당지 사이 석등에 있습니다. 지금 석등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사리장엄구가 출토된 서탑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의 제안으로 탑의 구조가 잘 보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탑의 초석에 정방형의 구조로 큼지막한 돌덩이가 깔려있고 십자로 모양의 길이 보인다. 십자로 정중앙에 유골함같은 심초석이 오뚜마니 올려져있다. 그 곳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퇴되었단다.

“서탑 중앙에 심초석을 보세요. 황룡사 9층 목탑지에서도 저런 심초석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옵니다. 사방으로 난 십자로 같은 돌을 따라가면 4개의 문이 달렸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방 3칸씩의 구조였지요. 이것도 목탑의 구조입니다.

초석 바깥에 3개의 석인상은 돌장승의 원형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이까지 해체한 것도 10여년이 걸렸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고 신중해야합니다. 더 이상의 해체는 기단의 안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복원한다고 하면 동탑이 완벽하게 복원되었으니 서탑은 6층 정도로 복원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서탑 1층으로 내려오면서 안내도를 보고 설명하시는 스님께 평소에 궁금한 우동, 전각, 두공 양식을 물어보았다.

“낙수면과 낙수면이 만나는 귀마루를 우동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이 이렇게 좋은데 우동이 뭡니까? 귀마루 바로 밑의 수직 부분이 전각이고 두공은 공포를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우동이 바로 석탑의 우동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요? 석탑의 우동도 굵잖아요.”라고 내가 말했다. 

나중에 조재숙선생님은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 “미륵사탑 지붕돌 귀마루가 우동이라면 석가탑의 지붕돌 귀마루는 국수겠네”라고 하신다.

 

 

동탑은 1993년에 서탑을 보고 복원했습니다. 98억을 들여서 복원했지만 서탑과 상당히 다릅니다. 백제인 고유의 미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모범을 보인 서탑이 있지만 복원에 실패한 것입니다. 미륵사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건너가는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익산 근처에는 황등면 등 화강석 산지가 많습니다. ”

 

 

스님께서 설명을 마치자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가 부처님 진짜 사리가 아닌가에 대해서 회원님들간에 설전이 있었다.

스님은 못 들은 척 서탑 쪽으로 이동하셨다.

사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 스님께 직접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내가 알 수 있나요?” 하신다.


미륵사터가 늪지였다는 것과 삼원일가람식 구조로 보아 무동과 선화공주의 불멸의 러브스토리도 실화가 아니었을까?

우리 스님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선화공주가 맛동을 남몰래 숨겨두고/ 밤마다 안고 논다”

얼마나 낭만적인 사랑 노래인가?

 

중앙에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에 있는 석등받침돌과 지붕돌을 보았다.

“우리의 전통 가람은 일직선 상에 중문과 탑과 석등과 금당과 강당이 놓인 것입니다. 요즘 법당 앞에 탑을 두 개 씩 놓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는 없었어요, 이것은 무식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석등 받침돌 위에 연꽃잎을 보셔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얇게 조각한 것이 정말 연꽃잎을 닮았습니다. 이런 우아한 연꽃잎은 신라의 섬세하고 화려한 연꽃잎과 다릅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부여박물관 앞에 놓인 가탑리 석등 받침돌 연꽃잎이 나온겁니다. 받침돌 앞에 동그란 구멍은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만 실상사나 금강산 묘길상 앞에 놓인 석등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별꽃님의 글에서 퍼옴)

 

 

 

 

두줄의 돌 흔적은 회랑이 있었다는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