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전북 익산 미륵사지

보리숭이 2009. 7. 7. 15:41

익산 미륵사지 [益山彌勒寺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金馬面) 기양리(箕陽里)104-1번지에 있는 미륵사 터 로서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익산시에서 관리하고 있고 면적은 1338만 4699㎡으로,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의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추정 규모로는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600~641년)601년(무왕 2)에 왕후의 청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의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는것이 특징이다.

백제 최대의 익산 미륵사의 창건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데,기록에는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이산토성.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있는데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왕이된 무왕(백제30대왕.AD.600~641)이 왕비와 더불어 용화산(현재 미륵산)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왕비가 무왕에게 절을 세우기를 청하여 미륵삼존을 위한 전.탑.낭무를 세곳에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 창건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발굴조사를 통해 못을 메운 흙이, 산흙이라는 점과 가람이 3원으로 구성된 것 등이 확인됐다.

미륵사지는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되었으며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였으며,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하는 등에서 확인 되듯이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발원하여 건립된 것이다.

미륵사지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 때 이미 조사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또한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토기·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국 5년 경진'(國五年庚辰)·'요봉원'(姚奉院)·'지원 4년'(至元四年)·'천력 3년'(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익산미륵사지의 역사

638년 : 벡제 제 30대 무왕,왕후의 간청으로 미륵사 건립 

639,1.29(음) : 서 석탑 사리 봉안

641.3 : 무왕 승하
1920년 : 석탑에 시멘트 미장(일제 강점기).
1962.12.20 :서석탑 국보 제11호 지정
1966.6,22 : 미륵 사지 사적 제 150호 지정
1974,8 : 원광대학교 발굴조사팀 동탑지 발견
1980.7,7~1996년 문화재 연구소 미륵사지발굴 조사단 발굴조사
1985년~ 유구에 대한 정화작업 실시

1992~ : 동탑 복원

1999 : 안전진단 결과 구조적 안전성 우려로 해체 보수 정비 결정

2000.10 : 동 석탑지 정비중 금동향로(金銅香爐) 발견
2002년 : 서 석탑 국보 제11호, 복원을 위한 헤체~2014년 까지 보수 정비 

2009,1,14 : 서 석탑 헤체중 사리장엄구 발견

 

 

내용출처 : http://blog.cha.go.kr/guardofjinju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