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쉼터

새 시집<그늘의 발달> 발표한 문태준 시인

보리숭이 2008. 12. 6. 19:47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눈물을 감출 수는 없어요

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

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누물은 웃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출처] [시] 문태준 네 번째 시집 <그늘의 발달>|작성자 맨입찬손

 

작가와 문학사이](2)문태준

[경향신문] 2007년 01월 12일(금) 오후 03:51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받은 상보다 받지 않은 상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혹자는 ‘문사마의 시대’라고 했다. 욘사마만큼 인기 있겠는가마는 욘사마만큼 노곤할 일도 많겠다.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그의 고교동창이다. 김연수가 도서관 타입이고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라면 문태준은 마을회관 타입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사전에서 구출해 개인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런거리다’나 ‘뒤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듯 이 말들은 이제 문태준만을 사랑한다. ‘맨발’과 ‘가재미’를 거치면서 그런 말들 점점 많아졌다.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 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그가 ‘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하고 해석하고 교설하는 ‘나’가 겸손하다. “낮과 밤과 새벽에 쓴 시도 그대들에게서 얻어온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이런 겸허함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습관 같은 것이라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제로도 그렇게 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시를 대하는 태도와 시를 쓰는 원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얻어온 ‘그대들’의 목록은 다채롭지만 특히 ‘나무’에 진 빚이 커 보인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개복숭아나무’)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매화나무의 해산’) 세 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랐다. 모아놓고 보니 꽤나 닮아있다.

이 세 편의 시에서 그의 근본 중 하나를 짐작한다. 그의 시는 여자를 슬퍼하는 남자의 시다. 그는 나무에게서 하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잃은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본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출가한 누이에 가깝고, 시인은 고단한 그녀들 앞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혹자는 그의 시에서 장자(長子) 의식을 읽어냈다. 나는 차라리 철든 막내를 볼 때 누나들이 느끼는 애처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그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患候)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말아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출처] 문태준과 신형철|작성자 맨입찬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