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역사유적 탐방기
김천고 교감 박종근
우리 김천고 사회과 교사 가족 일행 27명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2008년 7월 30일 당일코스로 개성 역사유적을 탐방하는 육로 관광을 다녀왔다. 최근의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과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하여 중도에서 포기할까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백승환 사회과부장과 총무 김호균 선생님이 계획대로 추진하여 보람 있게 다녀올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새벽 2시 김천고 교문 앞에서 경북관광 버스를 타고 4시간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임진강휴게소에서 내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7시경 도라산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여권과 같은 개성 관광증을 목에 걸고 남측출입국관리소를 거쳐 현대아산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한 땅에 설레는 가슴으로 도착하였다.
그러나 차창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산하는 2년 전 금강산 관광 때 느낀바와 같은 우리나라 1960년대 농촌의 모습이었다. 민둥산, 무표정하고 왜소한 인형같이 서있는 군인들, 작업장에서 일하는 북한주민들의 그늘진 모습과 규격화된 농가, 철저히 통제된 듯한 삶의 모습들은
같은 동족으로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개성관광객 약 400여 명이 10여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우리는 8조에 배정되어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지난 해 10월 4일 밟으며 지나간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입경수속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르니 이제는 북측 안내원이 탑승하였다.
그 안내원이 고려역사와 개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웅변조로 설명해 주었다. 특히 고려 태조가 거란 사신이 선물로 가져온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는 자주적 외교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반도
최초의 국가를 통일신라가 아닌 고려로 설정하고 있었다. 가끔 졸고 있는 관광객들을 깨우기 위해 북측 안내원은 "나의 살던 고향"에서 시작해 우리가 모르는 북한의 노래를 감정을 넣어 불러주었다. 우리들은 열광적으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어 호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점점 굵어지는 비로 인하여 준비해간 우의를 입거나 우산을 쓴 채로 개성시 북쪽 16km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화강암암벽에 37미터 높이로 걸쳐있는 천하절경 박연폭포를 찾았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폭포의 하나라는 이곳의 물줄기는 우중이라 더욱 장관이었다.
박연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 전에 위에 고인 물이 직경 8m의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못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만 막상 연못 자체는 숲에 가려 보기 힘들었다. 폭포수가 떨어져 일구는 곳은 고모담이라는 커다란 못이 있고, 그리고 못 안에 왼편으로 넓적하게 튀어나온 용바위에는 황진이가 머리털로 휘갈겨
쓴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飛流直下三千尺(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곧바로 삼천 자나 떨어지누나)으로 시작되는 이 글귀는 초서체의 글씨로 마치 황진이의 예술적 자질처럼 잘 흘러내리고 있다고 하였지만 불어난 폭포 물로 인하여 북측 안내원의 제지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우의를 입은 채 나는 폭포 앞에서 아내와 함께 마치 송도 3절(조선 명종 때 학자 서경덕, 예술가 황진이, 절경 박연폭포)이 되는 듯한 감동을 맛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오른편 산으로 돌아 폭포를 감상하기 위해 마련된 범사정이란 정자를 지나 관음사 길을 오르는 중간에 고려 때 축성한 둘레가 약 10km라는 대흥산성의 북문이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폭포에서 관음사에 이르는 약2km 거리는 봄의 진달래,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 울창한 숲길이었다.
전성기에는 5개동의 건물이 있었다는 관음사는 북측의 국보문화유물 125호로 고려 광종 21년(970) 개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현존 건물은 정조21년(1797)에 중수한 것으로 지금은 대웅전 한 채만 복원돼 있었다.
아미타불을 모셨다는 전각의 이름이 대웅전인 것이 특이하였고, 불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부처님의 자비광명의 모습이 환희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절집 대웅전 지붕으로는 드물다는 우진각 지붕이 주위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매우 아름다웠다. 더 머물고 기도와 108배를 올리고 싶었지만, �기는 시간과 뒤에 들어오는 많은 참배객들로 인하여 불전에 정성스런 보시금을 넣고 경건하게 3배만 올렸다.
내려오는 산길은 한결 여유 있는 마음으로
돌아오니 굵은 빗줄기도 사라지고 차츰 맑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마치 무명의 세계에 있다가 부처님의 가피로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듯한 환희심을 안고 내려와 다시 버스에 올라 점심식사를 위해 개성시내로 들어왔다.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3년(1391)착공하여 조선 태조 2년(1393) 준공한 건물로 전화로 파괴된 것을 1954년 복구하였다고 하는 아담한 개성 남대문을 지나 통일관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500명 수용의 대형 민속요리 식당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북측봉사원의 친절한 봉사와 함께 개성전통음식인 반상기,개성보쌈벙식,인삼닭곰탕,개성약밥,더덕구이,장조림,감자전 등의 특산요리를 북한의 명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일행은 모두 개인별로 11첩 반상을 받았다. 물김치, 도토리묵무침, 도라지무침, 고사리볶음, 구이김, 약과, 계란떡, 생선튀김, 오이닭살무침, 탕국과 푸짐한 쌀밥이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나왔으나 쌀은 윤기가 별로 없어서 밥맛은 별로였다. 반면 반찬에는 조미료와 마늘 같은 양념을 많이 쓰지 않아 담백한 맛이 일품이어서 가능한 골고루 많이 먹었다. 곳곳에서 각자 10명으로 앉은 원탁의 식탁에서 북한의 술로서 “통일을 위하여!” 하며 힘차게 건배하면서 남북통일을 염원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선죽교와 숭양서원으로 향했다. 예쁜 한복을 차려 입고 목청을 돋워 설명해주는 여성 안내원의 모습이 순결한 연꽃같이 아름다웠다.
후에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를 문병 후 돌아오는 귀가 길에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의 철퇴에 맞아 정몽주는 붉은 피를 흘렸고 지금도 핏자국이 선연하다는 그 유명한 선죽교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감동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지만 선혈이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돋아나 선죽교로 바뀌었다는 설명에 주위를 휘둘러보았으나 대나무 흔적은 별로 없고 다리 위엔 불그레한 흔적이 남아 있어 정몽주의 혈흔을 상상케 해주었다.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에 대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로 답했다가 목숨을 잃은 정몽주의 충절 앞에 절로 가슴이 숙연해졌다.
작은 실개천에 아치형으로 바윗돌을 깎아 마련한 돌다리는 후손 정호인이 개성유수 시절인
1780(정조4)년 선조인 정몽주의 혈흔을 밟지 말라고 설치한 돌난간과 그 옆의 별교 역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명필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 앞에서 아내와 평생의 사랑을 약속하는 기념사진을 찍고 건너편에 있는 암수 거북이 이수로 유명한 표충비를 보러 갔다.
오른쪽 웅장한 암 거북이가 지고 있는 비석은 영조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세기에 세운 것이고 마찬가지로 거대한 왼쪽 수 거북이가 지고 있는 비석은 고종이 19세기에 세운 것인데 이 두 거북이를 만지면 자식 낳는데 효험이 있다는 전설 때문에 까맣게 손때가 타 있었다. 나도 마음속 염원을 담아 정성을 다해 거북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음에 찾은 숭양서원은 우뚝 솟은, 양지바른 곳이란 이름답게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는 정몽주의 집터인데 선조6(1573)년에 문충당을 세워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를 모셨다가 2년 뒤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추가 배향되는 인물들이 늘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엔 정몽주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김상헌, 김육, 조익, 우현보 등을 추가 배향을 하여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8)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이 철폐했다고
보고하곤 그냥 남겨둔 덕분에 살아남은 유서 깊은 곳이었다.
마지막 탐방지인 고려박물관은 원래는 992년 고려 성종 때 최고 교육기관으로 세운 국자감이 고려 말에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조선의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성균관으로 불리는 이곳의 건물들인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등 건물들과 주변 넓은 마당을 옥내외 전시실로 써서 박물관이 된 곳이다.
좌우 마당에 있는 천 년 수령이 넘는 아름드리 잘 생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쭉쭉 뻗은 모습을 즐기며 들어가는 길도 참으로 고풍스러웠다. 특히 북측의 단정한 미인 안내원의 절절한 안내 설명을 들으며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천하제일의 상감청자, 소중한 불교문화재 고려대장경 판목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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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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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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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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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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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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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사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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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내 전시실의 마지막 코스인 공민왕릉 석실 재현실에서 고려의 벽화를 감상하고 왼쪽으로 나오니 옥외엔 현화사 칠층석탑, 현화사비, 불일사오층석탑, 개국사 석등 등 문화재들과 고려시대 개경을 다스리던 관리가 머물던 고려유수영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사교과서에서 보던 소중한 북한문화재를 직접대하니 남북이 정말로 하나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는 민족동체감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박물관 바깥의 기념품판매소에서 여러 가지
북한 특산품을 고르다가 "개성명소"를 소재로 한 사진첩과 약간의 기념품을 구입하였다.
당일 일정이기에 왕건왕릉, 공민왕릉, 영통사, 서경덕과 황진이 무덤 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개성공단을 지나오게 되었다. 아침보다 한결 생동감 있고 발전하는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측(아태,민경련)이 개성공업지구 2000만평(66㎢)개발을 합의한 후 2003년부터 1단계 330만㎡조성사업이 진행 중이며, 앞으로 35만 명의 북측 근로자와
3만 명의 남측근로자가 2,000여 개의 기업에서 연간 200억 달러를 생산하고, 남북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계적인 경제평화특별도시로 발전할 것이라고 북측 안내원은 남북의 경제협조를 통한 자주적 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우리 모두는 힘찬 박수를 보냈다.
다시 버스로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면서 하루 속히 남북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북한 관광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새삼 내가 북측보다 자유롭고 풍요한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나 이렇게 백두산, 금강산을 거쳐 개성관광까지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맙고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다음에는 고구려의 수도이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하루빨리 탐방하고 싶다.
그리운 집에 밤 10시경 도착하여 박연폭포처럼 아름다운 경치에서 서경덕의 학문과 황진이의 예술을 논하며 정몽주의 충절과 개성박물관의 역사의 향기와 함께 조국과 민족과 자연의 소중함 속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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