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스크랩] 직지사(김천)

보리숭이 2007. 4. 10. 20:48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에 있는 사찰 직지사. 418년에 묵호자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
(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도,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참고로 황악산의 약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
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
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
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4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글·사진 김재일(사찰생태연구소장)

옛날 직지사 산문께는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나이 든 토박이들은 지금도 ‘장승백이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 장승은 임진왜란 이후 절집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수문장이다. 지금 남아있는 대둔사 장승이며, 벽송사 장승이며, 남장사 장승이며, 관룡사 장승이며 모두가 그렇게 해서 세워졌다.
장승들이 사라진 절집일수록 주변 환경이 나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황악산 직지사’. 이호신 作(30×51cm), 2000년.


요즘 직지사 산문을 돌아오는 능여계곡의 물이 몇 달째 탁류이다. 김천시가 민박마을과 문화공원을 조성한답시고 수만평의 직지사 들머리를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산문 코밑에다 수백평의 대형 식당을 짓겠다고 땅주인이 나서 이래저래 직지사가 골치를 앓고 있다.

직지사 일주문 기둥은 1천년 묵은 싸리나무라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느티나무이다. 절집 전설에서는 느티나무가 흔히 싸리나무로 둔갑한다. 느티나무는 무늬가 아름답고 재질이 단단해서 예부터 불상이나 사리함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전 천왕문 옆에는 사명당의 출가전설이 깃든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사명당은 어린 시절 황악산 기슭에서 유학을 배웠다. 당시 주지로 있던 신묵대사가 참선 중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 밑에 황룡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꿈을 꾸고는 급히 일어나 갔더니 한 소년이 은행나무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신묵은 부처님의 뜻이라 여기고 소년을 문하에 거두어 들였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은행나무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절의 외양은 예전보다 커졌지만 현재 직지사에는 베고 누울 만한 큰 나무가 없다. 직지사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오늘이 그렇다.


→ 깊은 명상속의 부처나비.

응향각 댓돌 곁의 상사화가 마지막 꽃망울을 남기고 있다. 댓돌 위에 놓인 스님의 하얀 고무신과 여름 내내 짝을 해온 상사화는 절집에 있어야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다. 상사화는 옛 스님들이 중국으로 유학 갔다 돌아오는 길에 처음 가져왔다는 꽃이다. 향적전 담장 아래 옥잠화, 자주달개비, 참나리, 맥문동 등이 꽃을 피우고 있다. 배롱나무, 구기자, 불두화도 이웃하고 있다.

부처나비 한 마리가 풀잎 위에 앉아 깊은 명상에 들어있다. 우리 학자들이 굳이 부처나비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나비의 학명이 ‘고오타마(gotama)’이기 때문이다. 애벌레들이 주로 벼과 식물들을 먹고 자란다는 점도 다른 나비와 구별된다.


→ 직지사 사명각과 명부전 사이에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응진전 앞에는 제철을 만난 파초들이 우람하고, 사명각 주위엔 요염한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절집 안의 식생을 돌아보노라면 옛 수행자들의 생태적 안목에 놀랄 때가 많다. 은행나무를 비롯해 파초, 배롱나무, 불두화, 상사화 등도 그들에 의해 전래된 식물들이다. 특히 파초는 ‘탈속’이라는 꽃말로 해서 절집에 더욱 잘 어울린다.

비로전 석탑을 지나 황악루에 이르면 ‘염주나무’로 불리는 피나무와 경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측백나무와 벽오동나무가 한 그루씩 나란히 서 있다. 벽오동(碧梧桐)은 줄기 색깔이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간혹 일반 오동나무와 헷갈리기도 하는데, 벽오동꽃은 연자주색 오동꽃과 달리 연노란색이다. 벽오동은 한 해에 한 마디씩 자라므로 마디 수를 세어 보면 나이를 알 수 있다.

산중다원에서 차 한잔을 음향하고 나서면 등산로가 보인다. 은선암, 중암, 백련암, 운수암 등의 산내 암자들이 모두 이 등산로 주변에 있다.

황악산은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산세가 우아하고 부드러운 육산이다. ‘黃岳’을 더러 ‘黃鶴’으로 표기해도 용서되는 것은 황악의 산세가 학의 잔등처럼 부드럽기 때문일 것이다. 등산로도 그렇게 급하지 않아서 여유롭게 산을 탈 수 있다.



→ 은선암 오르는 길에 핀 마타리꽃.

혼효림 가운데로 은선암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 있다. 숲을 찾아들면 햇볕 좋은 풀섶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싸리꽃, 누리장꽃, 물봉선, 맥문동, 질경이꽃, 며느리밥풀, 마타리, 까치수영, 구절초, 쑥부쟁이, 칡꽃, 닭의 장풀, 달맞이꽃, 꿀풀, 좁쌀풀… 가을을 마중 나온 꽃들이 피어있다.

여름날 은선암은 능소화가 한창이다. 높은 석벽이며 대웅전 마당이며 온통 능소화로 뒤덮혀 있다. 능소화 역시 옛 수행자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식물로 알려져 있다. 색상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서 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양반꽃’으로 불렸다. 그래서 상민 집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능여계곡은 직지사의 상수원으로, 이끼가 전혀 없는 1급수이다. 인간의 몸은 약 70%가 물이다. 몸 속의 물이 2% 부족하면 인간은 갈증에 시달리고, 5%가 부족하면 혼수 상태에 빠지며, 10%만 부족해도 생명을 잃는다. 산도 마찬가지이다. 지하수를 비롯해서 물이 5%만 부족해도 식물들이 종자를 맺지 못한다. 10%가 부족하면 그 산의 짐승들이 살지 못해 서식처를 옮긴다고 한다. 산중에 흘러내리는 물이라고 마냥 쓰고 버릴 게 아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삼거리에 관응스님이 주석하는 중암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길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서면 햇볕량이 많은 초지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구절초, 참취, 참나물을 중심으로 한 들국화 종류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들국화류 말고 꽃꼬투리가 오리를 닮은 진범, 초롱 모양의 연보랏빛 모시대, 화려한 주홍색의 동자꽃, 바람개비처럼 생긴 흰송이풀, 분홍색의 산오이풀, 사위질빵, 각시원추리, 누린내풀, 이삭여뀌 등이 보인다. 머지않아 초롱을 닮은 더덕꽃도 피어날 것이다.

날개 가장자리가 검은 대만흰나비를 비롯하여 긴꼬리제비나비, 왕자팔랑나비, 네발나비 등이 장삼자락 휘날리듯이 날개짓을 하며 앞서 길잡이를 한다. 야행성인 나방은 숲 속에서 미동도 없이 낮잠을 즐기고 있다.


→ 홍단딱정벌레는 황악산의 생태지표이다.

황악의 숲에서 볼 수 있는 딱정벌레 가운데 가장 눈길 끄는 것은 홍단딱정벌레이다. 우리나라 딱정벌레류 가운데 가장 덩치가 좋아 몸 길이가 4센티미터에 이른다. 머리와 딱지날개는 흑록색의 금속광이 나고, 가슴께는 붉은 광택이 난다. 딱지날개는 끝이 뾰족하고 길며, 7개의 검은 혹과 세로줄이 있다. 낮에는 돌이나 낙엽 밑에 숨어 있다가 밤에 활동한다. 직지사 숲의 생태지표종으로 이의가 없다.

백련암은 비구니 암자이다. 그래서 그런지, 백련암으로 오르는 걸음이 조심스럽다. 암자로 가는 숲길에 각시원추리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있다. 햇볕을 찾아 사슴처럼 목을 길게 내민 모습이 너무 안쓰럽다. 바람결에 땀도 씻을 겸 그의 짝이 되어주기 위해 곁에 앉았다.

감동은 오로지 개인적인 체험이기에 같은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동의 크기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가 자연을 사랑한 만큼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만큼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한 만큼 아름답다. 백련암 텃밭께 잘 자란 초피나무 두 그루가 인왕처럼 서 있다.

백련암을 내려오면 정상인 비로봉(1,111미터)까지는 운수암을 지나 쉬엄쉬엄 1시간 거리다. 더덕 냄새 풍기는 산길은 여전히 모로 누운 여인의 허리처럼 완만하고 부드럽다.

정상에 이르면 ‘비로봉’ 표석이 있고,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동북 방향으로는 추풍령을 지나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유연하게 뻗어있고 남서쪽으로는 삼도봉과 덕유산으로 산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포대기같은 황악의 품안에 직지사가 안겨 있다. 황악은 그대로가 관음이다.
 
위    치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홈페이지 : 직지사  www.jikjisa.or.kr 
관 리 소 : 직지사 종무소  (054-436-6174)
           매표소         (054-436-6175)
           직지성보박물관 (054-436-6009)
개    요 : 김천역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황악산 기슭에 있는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년) 아
           도화상이 세웠다. 절 안 주위의 울창한 오랜 소나무와 깊은 계곡의 맑은 물, 가을의 단풍이 
           절경이며, 주위의 조경과 잘 어울려 있다.
           경내엔 1천구의 아기부처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비로전(일명 천불전)이 있으며,  1,000년 
           묵은 칡뿌리와 싸리나무 기둥의 일주문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전, 통일신라시
           대 작품인 높이 1.63m의 석조약사 여래좌상(보물 319호)이 있다.
           한편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불교연수회관이 1994년 5월에 준공되었다. 
[황악산]
           황악산은 김천시에서 서쪽으로 12km떨어진 소백산맥 가운데 위치하며, 예부터 학이 많이 찾
           아와 황학산(1,111m)이라 불리었으나, 직지사의 현판 및 택리지에 황악산으로 되어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깊은 계곡에 옥같이 맑은 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화가 아름답다.
대중교통
 - 경부선 열차이용(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김천역 정차) 
 - 고속버스,시외버스 이용
 - 김천역 및 버스터미널 앞에서 직지사행 11번, 111번 시내버스 이용
   (06:00-22:40,10분 간격운행,25분소요) 
도로안내
 - 서울→경부고속도로 추풍령 인터체인지(3시간)→국도4번(김천 방면)→지방도903번→ 직지사
 - 부산→경부고속도로 김천인터체인지(2시간 30분)→국도4번(영동 방면)→지방도903번→직지사
현지숙박 : 지역번호 054
 - 구미장         436-6117   
 - 동원장         436-6206    
 - 부산장         436-6205    
 - 세림           436-6025    
 - 천일           436-6038     
 - 아미앙서       436-6114
 - 알프스         437-8993     
 - 김천 파크호텔  437-8000   
주요문화재명                 비  고
 -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 대웅전 삼존불 탱화        보물 제670호
 - 대웅전앞 3층석탑          보물 제606호
 - 비로전앞 3층석탑          보물 제607호
 -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
 - 한천사 출토 금동자물쇠    보물 제1141호
 - 청풍로 앞 삼층석탑        보물 제1186호
 - 직지사 대웅전             경북 유형문화재 215호
등산코스 : 직지사-운수암-황악산정상-동쪽계곡-직지사(12km, 5:00 소요)
정보제공자 : 1)(741-810)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620 
               <사>054-436-6177    <직>054-436-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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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기준일   2005년 06월0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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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색깔이 다릅니다. 남녀행자의 복장이...
고동색의 위아래 옷을 입은 분들이 남자 행자입니다.
남자행자들이 교육받았던 만덕전에서의 안행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대웅전에서 천불전으로 오르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수각이 있는 풍경입니다.
좀 유명한 장소로 많은 선남선녀들이 앞다투어 사진을 찍는 곳중의 하나입니다.



불기 2547년 부처님오신날 관욕단 장엄사진입니다.
관욕단 장엄이 화려하여 부처님의 상호가 더욱 돋보입니다.



초파일풍경

 

 



초파일 등  

 

 



몇년전의 사진입니다.
대웅전앞에 탑까지 연등으로 장엄할 때가 있었답니다.
지금보다 장관은 아니지만 청사초롱을 달았던 때의 모습입니다.
기록사진으로는 훌륭합니다.

 

 

 

출처 : 글1 -  홈

                    글 2  - 광공사홈

                                  사진  - 소구리홈갤러리발췌

출처 : 양지방이올
글쓴이 : 에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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