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스크랩] <역사 칼럼> 김천에 황녀(皇女)의 성장지 있었네

보리숭이 2013. 8. 23. 15:39

 

        역사 칼럼

 

                                   김천에 황녀(皇女)의 성장지 있었네

                                                                                 고종황제의 옹주

                                                                                호신책으로 김천 대항면에 숨어 자라

                                                                                                                                                                

                                                                                                                                                                   민경탁

 

  일시에 옹주의 신분에서 천민의 딸이 되어버린 황족(皇族) 이문용은 김천시 대항면 향천4리(속칭 방앗골ㆍ방하치ㆍ방아재)로 내려와 숨겨져 유모에 의해 성장하게 됐다.

  그녀는 김천 대항면 방하치에서 9년 간 갖은 고난을 겪으며 걸인소녀로 성장 하였다. 그후 임상궁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왕가의 예법을 익히며 자랐으나 입궁하지 못하고 진명여고를 다녔다. 1916년에 우국지사 김한규(金漢圭)의 맏아들 김희진과 결혼하였으나. 이내곧 일본 유학 중의 남편과 한 살박이 아들을 차례로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조 왕가의 마지막 옹주 이문용은 사생아로, 걸인소녀로, 여자빨갱이로, 청상과부로서의 기구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명성황후 민씨를 포함하여 13명의 여인과의 슬하에서 왕손을 두었던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아들 딸들은 많다.

그 중에 영친왕 이은(李垠)의 이복 동생이 되는 황녀(皇女)로 1900년 12월 3일 염 상궁을 생모(生母)로 하여 태어난 옹주 이문용(李文鎔)이 있다. 의화군 이강(李堈)이 의친왕에, 황자 이은(李垠)이 영친왕에 책봉되던 해에 상궁 염씨에게서 태어났으니, 덕혜옹주보다 11살 위의 배다른 언니가 된다.

  왕권을 향한 욕망과 암투가 뒤끓는 왕가(王家)의 딸로 태어나, 왕실 족보에 정식으로 올려지지 않은 왕녀도 허다했던 그 시절. 왕녀로 태어남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생명이요 삶이 아닐 수 없었던 이 때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은(垠:영친왕)을 낳아 기르는 엄 상궁의 득세가 이만저만한 지경이 아니던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문용은 학부대신이요 고종황제의 사촌인 이재곤의 주선으로 민영익 대감의 어느 민가에서 태어나고, 생모인 염 상궁은 즉시 죽임을 당하여 사생아 아닌 사생아, 고아 아닌 고아가 된다. 문용의 당숙되는 이재곤 대감의 주선과 임 상궁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진 것이다.

  그래서 문용은 왕의 여자들이 벌이는 암투극에 희생되지 않기 위한 호신책으로 임 상궁이 주선한 유부(乳父) 손창렬 내외의 외동딸이 되어버린다. 일시에 공주의 신분에서 천민의 딸이 된 이문용은 김천시 대항면 향천4리(속칭 방앗골ㆍ방하치ㆍ방아재)로 내려와 숨겨져 유모에 의해 양육되게 된다. 그러나 호신책으로 숨겨 길러지던 그녀는 얼마 아니 되어 유부(乳父) 유모(乳母) 내외의 결렬로 고아, 연자방아 소몰이, 걸인소녀의 신세가 된다. 그녀는 김천의 직지사 입구의 대항면 향천리 방앗골에서 9년 간 갖은 고난과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걸인소녀로 성장 하였다. 더욱 기구한 것은 이문용의 생모가 염 상궁이 아니라 임 상궁이라는 것이다.


  역사와 소설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런 탄생의 벅찬 비밀을 지키며 살아온 황녀 이문용의 생애는 파란만장하였다. 그 후 그녀는 임 상궁의 주선으로 다시 상경하여 창경궁 앞 원남동의 민가에서 왕가의 예법을 익혔으나 입궁하지는 못하였다. 진명여고를 다녔고, 1916년에 우국지사 김한규(金漢圭)의 맏아들 김희진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직후 일본 유학 중이던 남편과 돌박이 아들마저 잃어버리고 식객만도 못한 젊은 과부가 된다. 또 6ㆍ25 후에는 좌익활동을 하던 시동생의 생활비를 대준 것이 문제가 되어 사상범으로 몰려 장기 복역수가 되었다가 1970년, 10년의 옥살이 끝에 전주교도소에서 출옥 하였다. 말년에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전주 경기전(慶基殿)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 전주시 수직사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사생아로, 연자방아 소몰이로, 걸인소녀로, 청상과부로, 장기 복역수로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온 황녀 이문용의 삶의 여정은 눈물겹고 처절하였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1906.2~1967.10)의 생애와 유사한 인생 유전이었다. 이조 왕가의 마지막 옹주였던 그녀는 탄생의 벅찬 비밀을 간직한 채 참으로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문용(李文鎔)이 실존하는 이조 왕가의 마지막 옹주로 밝혀진 것은 유주현의 소설 ‘황녀(皇女)’로부터이다.

일찌기 춘원 이광수가 이문용 여사를 여러 차례 만나 “신라 말엽에 마의태자가 있었다면 이조 말엽엔 백의공주(이문용)가 있으니, 내 이를 작품으로 쓰겠다.”고 벼르다 마침내 작품화 하지 못했다. 황녀로 태어나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파란만장, 처참하게 살아온 이문용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황녀’는 1972년 10월 “문학사상”지에 연재되면서 탄생하였다. 이 장편소설은  1975년에 단행본 “황녀”(전 3권, 동화출판공사)으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현대 장편으로는 소설가 유주현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74년 MBC에서 드라마 ‘황녀’를 제작, 방영한 적이 있으며 2003년에 연극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그러자 이문용이 과연 황녀(皇女)냐 하는 진위 논란이 일었다. 이에 이재곤 대감의 아들 이면용(李沔鎔)이 그녀를 만나 친족임을 확인하기도 하였고 8ㆍ15 광복 후 황녀(皇女)로 봉해졌다.  


  경북 김천의 직지사 초입 대항면 향천4리(속칭 방하치)는 이러한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마을이다.

 

 

 

황녀 이문용(1900-1987)

 

 

김천시 대항면 향천 4리(방앗골)의 연자방아터

 

 

                                                                         -  "향토 김천"(2009. 10월호)의 게재분을 일부 수정, 재편집한 것임.

 

출처 : 송설3017 <김천중고등학교>
글쓴이 : 빛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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