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구 송설45회 우치구동문이 서울지구홈페이지에 올린 것을 퍼왔습니다.
송설45회 졸업생으로 성균관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김병건 동문(송설51회 김영두 동문의 친형이기도 합니다)으로부터의 "모교의 설립에 서울의 중동고등학교가 인연이 있으며, 설립과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중동고등학교 총동창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과연 모교의 설립과정, 송설당여사와 관련된 역사의 단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그 주소를 알려드리고, 전문도 전재합니다. 동문들은 직접 링크하여 한번 보시고, 송설총동창회에서는 역사의 일부로 기록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주소] http://chungdong.kr/?MID=bInfo&IDX=13807&IDX2=86656&page=&searchType=&searchVal=&CBIDX=699
[내용 전재]
김천고등학교는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님이 1931년 전 재산을 희사하여 김천에 설립한 학교이다. 최송설당은 젊은 시절 불우한 가정사로 갖은 고초를 겪다가 궁에 들어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영친왕)의 보모로 고종(高宗)과 엄비(嚴妃)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귀비(貴妃)에 봉해졌다. 그 후 고종이 승하하고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자 고향 김천으로 돌아와 가난한 이웃을 적극 구휼하는 활동을 하다가 1931년 전 재산(현 시가로 300억원 규모)을 기부하여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송설당(松雪堂)이라는 호는 고종이 직접 하사하였으며,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 시가를 남긴 여류 문인이기도 하다.
9년 전『中東 100年史』 ‘백농(白儂) 최규동(崔奎東)선생과 중동’을 집필하면서 일제 강점기 때의 자료를 살펴보던 중, 중동학교 교무주임인 안일영(安一英)선생이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중동학교 안일영선생이 김천고보 교장으로 가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보았으나 허사였다. 백농선생과 학교 운영문제로 알력이 생겨서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안선생이 1년 동안 김천고보 교장을 역임한 후 1932년 다시 중동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것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의문점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안선생은 백농선생과 인연이 남다른 분이다. 두 분이 처음 어떻게 만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백농선생이 당시 수학계 거두 유일선(柳一宣)선생이 설립한 정리사(精理舍)라는 학교를 다닐 때, 백농선생에게 유선생을 소개한 분이 안선생이었다. 그 후 백농선생이 폐교 위기에 놓인 중동을 인수한 뒤 지방에 계셨던 안선생에게 도움을 청하자 기꺼이 상경하여 수학교사로 부임했다.
대수(代數)는 백농선생이 뛰어났고, 기하(幾何)는 안선생이 뛰어나 당시 장안에서 “최대수, 안기하”라고 일컬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두 분은 우리나라 근대 수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안선생이 무슨 연유로 김천고보 교장으로 부임했는지 그 해묵은 의문은 얼마 전 백농선생 4녀 최성옥여사를 뵙고 말씀을 나누던 중 모두 풀렸다. 올해 96세이신 최성옥여사는 어려서 있었던 일들을 아직도 소상하고 뚜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최여사 말씀이 송설당님이 수송동 자택으로 선친 백농선생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송설당이 자신의 전 재산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백농에게 상의를 하니, 백농이 학교를 세워 우리 민족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것이 시급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씀했는데 송설당이 백농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했고, 누구의 요청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천고보 설립 인가를 받은 후 안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컨대, 아마도 송설당이 처음 학교를 설립하고 기반을 잡을 때까지 백농에게 도움을 청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래서 백농선생이 당시 중동학교 교무주임인 안선생을 김천고보 교장으로 추천했을 것 같다.
다시 당시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니 1931년 3월 24일 안일영선생이 김천고보 교장으로 부임하고, 다음날인 25일 정열모(鄭烈模)선생이 교무주임으로 부임했는데, 정열모선생도 중동학교 교사였다는 동아일보 기사[金泉高普敎員 認可願提出 1931. 3. 17. / 金泉高普校에 安․鄭 兩氏 赴任, 1931. 3. 29]가 있었다. 정선생은 당시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글학자로도 유명한 분인데, 부임하자 김천고보 교가를 작사했으며, 1932년부터 43년까지 김천고보 2대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 이 분은 충북 보은 출신으로 호가 백수(白水)인데 김천을 지극히 사랑한 마음으로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파자(破字)하여 호를 ‘白水’로 지었다고 한다. 김천고보 초창기 기틀을 마련하는데 안일영, 정열모 두 분 선생의 노력이 컸던 것이다.
사회에서 김천고등학교 동문들을 보면 어딘가 우리 중동과 기질이나 동문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우애가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 연유는 바로 학생들에게 남아다움과 대의(大義) · 신의(信義) · 정의(正義)를 소중한 가치로 늘 강조하셨던 백농, 송설당 그리고 안일영, 정열모선생의 가르침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김천고등학교에서는 최송설당여사의 기일이 되면 지역 유지, 동문, 재학생이 모여 기제를 올리고 묘소 참배를 하면서 그 분의 공덕을 기린다고 한다. 부러운 일이다.
송무백열!(松茂栢悅 : 소나무가 무성해지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함을 비유).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김천고와 중동고는 설립자 때부터 80년이 넘는 오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남의 접합점에는 언제나 민족교육에 큰 뜻을 두신 백농, 송설당 두 어른의 숭고한 정신이 숨 쉬고 있었다.
부디 양교 동문은 송무백열의 마음으로 오랜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며, 중동과 김천의 가없는 발전을 서로 격려하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백농, 송설당, 안일영, 정열모선생님도 지하에서 무척 흐믓해 하실 듯 싶다.
학술·홍보위원회 위원장 67회 이명학(성균관대학교 교수) 씀 [내용 전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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