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역사관

김천에 모신 최송설당 여사 증조부 묘가 정말 허묘인가?

보리숭이 2012. 3. 7. 22:17

 

3월 7일(수) 오후 수업이 끝난 뒤 김천시 부곡동 학교 뒤 산에 허묘를 만들고 제(祭)를 지냈다는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최주사가 학교에 근무할 때, 최송설당여사의 묘소가 있는 뒤에 허묘가 있다한 것이 기억되어 박희식님에게 문의했더니 매년 허묘에 가서 벌초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길이 험하여 가기가 힘들거란다.

박희식님이 학교 일에 바쁜지라 청운관에서 일을 하고 있던 조영준님의 길안내를 받아 허묘를 향했다. 

 

 

 이름 모를 묘 2동이 있다.

 

 

 멀리 약수터가 보인다.

 

 

 운막이 보이는 이곳에서 길없는 산길을 올라간다.

노루 배설물이 보인다.

 

우선 백운관 뒤쪽 산길을 따라 약수터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약수터가 가까운 곳에서 조금 더 가니 학교의 땅에 누군가가 밭을 갈고 도라지 등을 기르고 있는 밭에 운막이 있고 우측으로 길도 없는 곳을 조영진님이 앞장선다.

 

 

증조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허묘

 

증조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허묘

 

학교 산 꼭대기 근처에 이르니 상석이 보인다. 저곳이 최송설당 여사가 증조부 최봉관 묘소를 대신하여 증조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허묘인가 보다. 

허묘의 상석 중앙에는 이 묘가 화순최씨 봉관의 묘임을 알리고 있다. 좌측에는 증손녀 송설당이 석물을 마련하고 증손자는 광익임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위 상석 좌측의 내용을 보면 함양에 있었던 묘를 임자년 봄에 이곳으로 면봉([緬奉]했다는 기록이 있다. 면봉의 뜻이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면례(緬禮)’를 높여 이르는 말로 (사람이 윗사람의 무덤을)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내 드리다로 되어있다 그러면 허묘가 아니고 실묘인것이 아닌가? 좀더 알아보아야겠다.

증조부 허묘 봉분 앞 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증조부 허묘 봉분 뒤 쪽에 너구리 굴이 보인다.

봉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매년 학교에서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하나 봉분이 파진 곳이 많고  앞쪽도 들쑥 날쑥하여 평탄하지 못하다. 봄을 맞아 너구리가 굴을 파 집을 만든 흔적도 보인다. 전남 함평에서 본 조부와 부모님 묘소와는 대조적이다.

가까우면서도 높이 있어 제대로 돌보지 않은 탓이리라.

다시 이 곳을 찾아 오면서 조금 더 쉽게 올라올 길은 없을 까하여 보니

최송설당 묘소 좌측 길을 따라 약수터가 있는 곳까지 올라와서 운막이 있는 산언덕을 타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듯 우측으로 가면 이곳이 나오리라 기록해 둔다.

 

돌산

취백헌 뒤의 최송설당 소유 표지석

최송설당 묘소가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르니 돌산이 나타난다. 이 돌무더기를 보니 중학교 때 운동장 계단 공사의 기초를 위해 중/고 전교생이 이곳에서 운동장으로 돌을 날랐던 기억이 난다.

취백헌 뒤쪽 바위에 '최송설당소유' 문구가 있어 이 곳이 최송설당 땅임을 표시하고 있다.  

 

김선생님 송별기념 사진의 최송설당소유 석 (대구송설동창회 이정수부회장 제공)

최송설당 묘소 오르는 계단으로 향하여 다시금 최송설당 여사의 묘소를 둘러보니 최송설당 여사 우측에 있는 상석에 눈이 간다. 아버님이 부인을 상처한 후 결혼한 최송설당 여사의 어머님 묘소가 함평 신광면 군유산 삼천동에 아버님과 함께 합장되어 있음이 표시되어 있다.

지난 4일 방문한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三泉洞)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을 해 두었음에도 별 관심없이 그냥 본 자신이 부끄럽다.

이는 1886년(병술년) 6월 9일 최송설당여사의 부친(昌煥)이 별세하여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三泉洞)까지 5백리길을 운구하여 장례를 지냈다고 송설60년사 최송설당 약력에 기록된 것과 일치된다.

최송설당 묘소 우측에 있는 상석 중앙에는 최창환의 부인 연안김씨의 상석임이 표시되어 있다.

연안김씨의 묘소가 기장에 있었으나 잊어버려 이곳에 제단을 을묘년 봄에 송설당이 석물을 하여 제사를 치루고 있다는 문구가 보인다.

 

다시 한번 신원을 복원하고 선조 묘소를 찾은 기록을 되새겨본다.

 (신동아 2007.06.01 통권 573 호 (p580 ~ 595)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4]에서 발췌)

영친왕 이은의 보모가 된 지 4년이 지난 1901년, 최송설당은 고종에게 가문의 신원을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몰적(沒籍)된 최씨 가문을 복권시켰다. 최씨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한 지 무려 89년 만에 신원을 풀었다.

어린 시절 女史의 아버지 枳南居士는 서당 훈장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항상 외다시피 先祖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아버님의 유언과 같은 약속한 대로 조상의 원한을 푼 최송설당은 평안도 어느 곳엔가 아무렇게나 묻혀 있을 고조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김천에 허묘를 만들고 제(祭)를 지냈다. (위 석물의 내용을 보면 고조부가 아니고 증조부이며 허묘이던 것을 선천 오목동에서 찾은 후 이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14년에는 양동생 최광익의 맏아들 최석태를 정주와 선천으로 보내 조부가 고부로 유배된 이후 104년 동안 방치한 8대조까지 선조 묘소를 찾게 했다. 김천에 허묘를 만든 고조부의 묘소를 선천 오목동에서 찾았고(여기의 고조부도 증조부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정주 백현에서 8대조와 7대조 묘소를 찾았다. 6대조 묘소는 봉학산에서, 5대조 묘소는 아미산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렇게 다 찾아 놓고 석물까지 해 놓았다하나 평안도 선천과 정주 땅에 가보지 못함이 아쉽다. 통일이 된 그 날 꼭 가보아야겠다.(장영규님의 지적에 따라 증조부, 허묘가 아니고 이장된 묘로 수정하여 글을 다시 올린다.이 부분은 더 연구를 해 보아야할 부분이다.)

최송설당 묘소

최송설당 여사 묘소의 좌측 길을 접어 들어 허묘에 갈 수 있다.

최송설당 여사 묘소 가는 계단

 

 

송정과 취백헌

기숙사 좌측이 청운관 우측이 백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