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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말을 건네 보세요.

보리숭이 2009. 10. 14. 17:48
나무에게 말을 건네 보세요.

나는 어린 시절을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한 구절처럼 “참하 꿈엔들 잊힐 리”가 없는 바로 그런 시골에서 자랐다. 봄이면 할미꽃 피어나는 뒷동산에서, 여름이면 시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물장구치고 놀았다. 그러나 산으로 들로 소를 몰고나가 여물을 먹이던 시절도 잠시였다. 아버님께서는 맏아들을 제대로 공부시켜 보시겠다고 중학교부터 보따리를 싸서 지방의 한 중소도시로 유학을 보내셨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열심히 공부하면 학비전액 면제 장학금을 준다기에 부모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메마른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촌티 나는 차림새로 서울대 교문을 주춤거리며 들어서던 때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서울의 세련된 학생들을 보면서 주눅이 잔뜩 들었다. 그러나 첫 학기 성적표를 받고 나서야 ‘특별시’에 사는 사람들도 별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치열한 경쟁시대로 돌입한 것 같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는 우리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살아남는 길은 공부하는 길 뿐이었다. 시골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소위 말하는 ‘빽’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공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학을 가보니 촌놈이 서울대 갈 때와는 또 달랐다. 전국에서 모인 인재가 아닌, 이젠 전 세계에서 모인 유학생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 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우물 밖으로 껑충 뛰어 나오려고 또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로 30년째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강의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직도 매 시간 강단에 설 때마다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이다. 해마다 새 학생들을 맞이하고 가르치면서 그들을 미래의 학문세대로 길러내는 것이 내 본업이다.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이 나라의 기둥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교수 스스로가 더 많이 준비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누구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이요 학문과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불을 밝히는 날이 늘어갔다.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할 주말까지도 연구실을 지키곤 했다. 취미생활도, 여가생활도 없이 오로지 책 속에 묻혀 살았다.

어느 날 나는 문득 나이 들고 고단해진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콘크리트 연구실과 아파트를 전전하며 도시에 갇혀있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뒤늦게 ‘꿈엔들 참하 잊힐 리 없는’ 고향 산천을 다시 찾았다. 거기에서 비로소 오래 잊고 살았던 자연과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주말마다 허겁지겁 소백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깊은 숲 속에, 흐르는 계곡물에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씩 쏟아냈다. 심호흡을 하며 산 속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흐르는 물소리, 우짖는 새 소리, 솔숲을 훑고 지나가는 솔바람 소리까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갖 문명의 소리로 멍멍해진 귀가 맑아짐을 느낀다. 이름 모를 들꽃에게 가만히 말을 건네 본다. 무심히 누워있는 바윗돌과도 얘기를 나누어 본다. 차츰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얘기들을 숲 속에서 주절거려 본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소백산이 내 고단한 삶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었다.

미처 못다 쏟아놓은 사연들을 안고 또 다시 서울로 향한다. 거기엔 내 일상이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다. 일주일을 또 부지런히 산다. 이젠 경쟁이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말의 소백산 행을 위해 치열하게 산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철따라 아름답게 피어나는 산속의 들꽃 한 송이와 나눌 이야기꺼리를 준비한다. 주말에 내려가면 길가에 밟히는 볼품없는 풀 한 포기에도 사랑의 눈길을 보내리라 다짐한다. 자연과 나눌 이야기보따리를 싸다보면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소백산에 쏟아 낼 푸짐한 보따리를 안고 주말이면 다시 자연을 찾는다.

소백산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지만 산 속의 주인공들은 항상 바뀐다. 지난주에 폈던 꽃은 사라지고 이름 모를 다른 꽃이 피어있다. 계곡의 물도 그 물이 아니다. 떡갈나무의 잎사귀도 조금 더 넓어졌다. 사과나무도 조그만 열매를 달기 시작한다. 이렇게 계절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주인공을 바꾸면서 요술을 부린다. 이번 주엔 또 누가 주인이 되어있을까 늘 궁금증을 안고 산을 찾는다. 그리고 내가 들고 간 보따리를 탁 풀어 놓는다. 아낌없이 풀어놓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홀가분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연은 어김없이 내 보따리 값을 넉넉히 쳐준다.

뒤늦게 찾은 고향에서 자연에 심취하고 있다. 지금 와서 돌아다보니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그 때 좀 더 일찍 산을 찾았더라면, 그 때 꽃에게 말을 걸어 보았더라면, 그 때 흐르는 계곡 물에 그 열기를 식힐 수 있었더라면, 내 삶이 조금은 덜 허둥거렸을 것도 같다. 나이 든 오늘이 아니라 청소년 시절에 일찌감치 자연과의 교감을 느꼈더라면 내 삶은 좀 더 여유로웠을 것 같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지금이라도 자연에 기댈 수 있게 된 것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이번 주말에도 나는 어김없이 소백산을 찾을 것이다. 그 속에 내 삶을 더욱 여유롭게 해주는 넉넉함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사람답게 사는 지혜와 해답이 있다는 것을 이젠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청시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