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동창

친구의 얼굴, 또래의 얼굴

보리숭이 2008. 11. 5. 21:40

제97회

송정으로 가는 추억 마차
글 : 박인기
구성 : 김동범
친구의 얼굴, 또래의 얼굴

우리는 옛 친구를 무엇으로 기억하는가. 이 물음이 심오한 우정철학의 화두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정답은 오히려 평범하다. 우리는 옛 친구를 ‘얼굴’로써 기억한다. 얼굴은 첫인상의 마력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얼굴은 바래지지 않는 마음의 사진으로 저장되기도 한다. 아, 그때 얼굴로써 만나지 않았다면 무슨 흔적으로 옛 친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얼굴 없는 친구’란 존재할 수 없다.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안 떠오르는 경우는 있어도, 이름은 생각나는데 얼굴은 안 떠오르는 경우란 드물다. 얼굴이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서로의 관계를 보증하는, 이미지로 된 마음의 증서이다. 누구도 쉽게 지우지 못하는 이미지 증서이다. 정말로 두 우정이 감격스럽게 해후하면 서로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마음의 정을 무언으로 주고받는다.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이다.

1962년 3월 송설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우리 친구들의 얼굴은 말 그대로 홍안 소년이었다. 국민영양지수가 형편없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살찐 얼굴빛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인생의 봄을 향하여 막 피어나려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물기가 오르는 봄버들 같은, 여린 듯 파릇한 생기의 아름다움이 감도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해맑은 동안(童顔)으로 귀여운 티가 채 가시지 않았던 고운 얼굴들로는 정영수군의 얼굴과 김주호군의 얼굴이 떠오른다. 큰 눈에 피부가 희었던 김국수군의 얼굴도 인상적이고, 지금 농협중앙회 전무를 하는 서인석군의 귀티 나는 얼굴도 참 참했었다. 맑고 귀여운 표정이어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던 진주환 군의 얼굴도 떠오른다. 키도 훤출하고 체격도 있으면서 얼굴 피부가 부드럽고 깔끔했던 홍정우군의 얼굴도 생각난다.
자라면서 우리들 중에는 제법 청년의 기상이 느껴질 정도로 어른 티가 나는 얼굴들도 생겼다. 중3 때 한 반이었던 정두진과 김진옥은 거뭇거뭇한 수염 징후를 짙게 드러내며 어른 티가 나는 얼굴로 가끔 교실에서 힘겨루기를 하며 기골의 장대함을 보여 주었다.

우리 송설 동기들은 대부분 1949년생 아니면 1950년생에 속한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옛날 같으면 족히 할아버지의 범주에 들고도 남는다. 그러나 세상이 젊어지고 사람들 수명이 늘어났다. 우리 친구 중 그 누구도 노년의 세대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아흔이 될 때까지, 오히려 앞으로 남은 30년 세월을 알차게 기획하라고 권유한다. 늙음에 쉽사리 끌려가지 말고 젊음 쪽을 향하여 살자고 서로에게 최면을 건다.

세월이 지나간 흔적은 우선은 얼굴에서 나타난다. 몇 십 년 만에 송설 동창을 만나고 그 얼굴이 많이들 변하여 누구인지 못 알아볼 때가 있다. 집에 돌아와 송설 학창 시절 앨범을 꺼내어 확인해 보면, 홍안 소년의 까까머리 동안(童顔)으로 친구가 거기에 있다. 쓰다듬어 주고 싶도록 해맑은 소년의 얼굴이다.

덩달아 나의 얼굴 또한 앨범에서 다시 확인해 본다. 3학년 2반 25번 박인기, 머리 박박 깎고 순진한 촌뜨기의 표정으로 내가 거기에 있다. 문득 거울에 지금의 얼굴을 비추어 본다. 어떤 초로(初老)의 사내가 거울 안에서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세월을 누가 막으랴.

가끔은 동갑내기 연예인들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야 원래 얼굴을 가꾸는 사람들이니까 비교적 괜찮은 얼굴 형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도 아직 저들과 같은 나이의 부류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위안의 정서를 챙길 수 있기도 하다. 조금 더 적극적 마인드를 가져도 좋다. 나 또한 저 정도로 유지를 해 봐야지 하는 의욕을 심어 본다. 그런 뜻에서 우리 또래 연예인들을 얼굴 중심으로 점호해 보기로 하자.

탤런트 한진희는 1949년생이다. 경기고등학교를 우리와 같은 연도로 다녔으니 또래임이 틀림없다. 자세가 곧고 말투가 반듯하여 늙지 않는 인상이다. 개그맨 전유성도 1949년생이다. 유머적 천성 탓일까. 아무 나이와 어울려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다닌다. 탤런트 김동현(혜은이의 남편)은 1950년생이다. 선이 굵고 남성적이어서 그 강인해 보이는 인상으로 젊음의 이미지를 잘 유지한다. 우리 친구로는 장 현군이 비슷한 분위기이다. 젊어서부터 걸쭉한 캐릭터로 이미지를 고정시킨 배우 최종원도 1950년생이다. 미리부터 나이 먹은 태를 갖추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고서는 더 늙지 않는 이미지이다.

구수한 캐릭터의 배우 김성한도 1950년생 연기자이다. 토속적 이미지를 브랜드로 가지고 있는데, 이런 배우는 젊었을 때 나이 들어 보이지만, 나이는 거기서 고정되는 느낌을 준다. 가수 최백호도 1950년생이다.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늙지 않는 인상을 준다. 또 다른 1950년생 가수 조용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국을 순회하는 대규모 라이브 무대를 조용필 특유의 열창으로 석권하고 있다. 아무도 그를 환갑노인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또 다른 1951년생 배우 안성기도 마찬가지이다. 촬영현장에서 몸을 던지는 열정어린 연기 때문인지 아무도 늙은 배우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인들 그런 열정을 만들지 못할까.

매끄러운 도시풍의 마스크를 가지고 있는 1950년생 연기자 가운데 이영하와 임성훈도 빼놓을 수 없다. 원래 젊은 시절 꽃미남 얼굴이 나이 들면 비교적 먼저 늙기 쉬운 법인데 이들은 아직은 늙은 얼굴이 아니다. 사랑의 열정이 노화를 지연시키는 면이 있다고 했던가. 임성훈의 경우는 꾸준한 운동과 자기 다스림의 절제가 노화를 물리치는 묘방으로 작용한다고들 한다. 개그맨 김병조도 1950년생이다. 그는 한결같고 꾸준하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인들 못할 것이 없다.

1950년생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서는 더욱 용기를 얻을 일이다. 저들이 우리와 동갑이라는데 우리 얼굴이 먼저 늙을 일이 절대로 아니다. 그냥 죽 호명해 보기로 한다. 김자옥, 이효춘, 김형자, 김영애 등이 호랑이 띠 1950년생이다. 고두심과 김수미는 1951년생이다. 이치상으로 보면 서로 또래가 같으니 그들 젊음에 맞먹는 대응력을 응당 갖추고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다시 자신의 얼굴을 보자. 다시 송설 친구들의 얼굴을 보자. 사십년 넘어 너무도 친밀하게 쳐다보고 너무도 만만하게 지내와, 이제는 주름살 한 줄도, 눈 빛 한 줄기도, 숨소리 한 결도, 일순의 찡그림조차도 알만하게 간파되는 친구의 얼굴이다. 친구의 얼굴을 마주대고 말해 볼거나.
“내가, 네 얼굴만 봐도 다 안다!”

생각하면 이런 위안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송설의 인연이 참으로 그윽하기도 하고 모질기도 하다. 그러니 서로의 ‘얼굴’을 위하여 건배하자. 저 동갑내기 대중 연예인들의 얼굴과 견주어 조금도 꿀릴 것 없는 자존심과 의욕으로, 우리들 얼굴에 환한 기운을 서로 실어주며 실어가며, 그렇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