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보 18,19,20호에 게재되고, 2002년 정기총회에서 제안한 송설33회 민경탁동문의 <교가 바르게 알기> 제안 내용입니다. 2003년 정기총회에서 아래의 <역사를 바로 찾자> 송설 38회(김천중35, 김천고22) 김복연동문의 제안 내용과 더불어 제안에 대한 최종 결정은 회장단에게 일임하였습니다.
송설인의 노래 교가(校歌) 바르게 알기 (송설 제33회)민 경 탁 교가에는 학교의 교육 이념과 그 실현에의 정신이 담겨 있어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우리는 모교 사랑과 동문애를 다져갑니다. 또한 사회인이 되어 언제 어디서든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우리는 이상 푸르렀던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맛보기도 합니다.
교가 작사자와 작곡자 우리 교가는 작사·작곡자의 유명도와 그 내용의 심오함 그리고 곡의 장중함으로 자랑할만하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작사는 모교의 제2대 교장으로서 12년을 재직하였으며, 이른바 일제 시대 <조선 어학회사건>으로 감옥 생활까지 겪으신 한글학자 정열모(1895-1967)님입니다. 이 분은 1931년 4월에 모교의 교무주임(현 교감)으로 부임하시어 근무하시면서 1932년 1월 8일 교가를 작사하시고 그 해 1월 15일에 교장으로 취임, 재직하시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 투옥되어 고생을 하신 것으로 알려 있습니다. 그 후 이분의 이력을 좀더 살펴보면 1943년 3월 교장에서 퇴임, 1944년 9월 30일 함남 홍원 유치장에서 석방되어, 김천시 다수동에서 1년 넘게 사셨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상경하시어 1945년 9월 현 숙명여대 교수로, 1946년 2월 국학대학의 창설 학장으로, 1948년 8월 15일부터는 홍익대학교 초대학장으로 2년 간 근무하셨으며, 1949년부터 <한글학회> 이사를 지내신 것으로 알리고 있으나 6·25 때 납북되어 1950년 그 이후의 생활상은 남한에서는 더 이상 알 수 없고 다만 <한글학회>에서 소개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1967년에 별세하신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가의 작사자는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로서 서울대 음대 초대학장을 지내셨던, 대구 출신의 음악가 현재명(1902-1960)님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즐겨 부르는 한국 가곡 '산들바람' '고향 생각' '그 집 앞' '뱃노래' '바다로 가자' 등이 이분의 작곡 작품입니다. 이런 훌륭한 음악가께서 우리의 교가를 작곡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모교의 교가는 명곡이 되기에 족한 것이며, 우리 송설인에겐 영광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렇듯, 한국 음악계의 선구적인 음악가에게서 작곡된 교가 '삼한대처 …'는 언제 어디서 불러도 그 감흥이 유려하고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명곡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노래이든 명곡은 먼저 그 가사가 깊고 큰 뜻을 가진 명작이랍니다. 이를테면 음악애호가들로부터 음악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제4악장은 이 곡 전체의 절정이 되는 부분(흔히 '환희의 송가'라 일컬어짐)으로 실로 장엄하고 화려한 명곡이지요. 바로 이 부분은 독일의 시인 쉴러의 "환희에 붙여"라는 시에 베토벤이 곡을 붙인 것이랍니다. 한국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며 "비목" 그리고 가수 이동원과 서울대 음대 박인수 교수가 함께 불렀던(학계의 지탄을 무릅쓰고 부름) "향수"란 노래도 그 가수가 서점 골목에서 찾아낸, 해금 시인 정지용의 명시 '향수'"를 발견함으로써 그 노래가 잉태되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곧, 명 가사에서부터 명곡은 탄생하게 된다고 하겠는데, 한국 민족사에 빛나는 국어학자와 선구적인 음악가 사이에서 탄생한 우리 교가도 그런 명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가 가사에 담긴 뜻 그럼, 우리 교가 가사를 한 번 살펴보십시다. 교가 가사를 곰곰이 음미해보면 작사 당시의 시대 상황(조선어 말살 정책)을 뛰어 넘는 국어 존중의 정신이 돋보입니다. 곧, 주체성 있는 한국어 어휘와 구절들 그리고 작사자의 한글 사랑 정신과 한국어의 아름다운 운율미가 잘 내어 비친답니다. 부끄럽게도 그 어떤 부분은 뜻을 알 듯 말 듯한 곳도 있지요. '삼한대처' '다사할손' '들며나며' '갈마들어도' '가신배 없다' '즈믄 선도들' 같은 구절들이 그러한 곳들인 것 같습니다.
제1절의 첫머리 '삼한대처'란 잘 알다시피 옛 삼한시대의 넓은 벌을 가리키겠지요. 김천은 옛 삼한(마한, 진한, 변한) 중, 변한의 한 부족국가였던 '감문국'과 '조마국'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두 부족 국가에서 김천의 역사는 출발하는 것으로 학계에 알려 있습니다. 그 감문국은 처음엔 "감로국"으로 불렀는데, 지금의 개령면과 감문면을 합친 영역으로서 현재의 개령 동부리가 그 읍성의 중심지였습니다. 현존 개령면 동부리의 '감문산성'과 그 시대 어느 왕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부인 왕릉', 신라시대의 고찰 '계림사', 감문면 오성리에 있는 신라 '김효 왕릉'으로 추정되는 '말무덤' 등의 유적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조마국'은 지금의 조마면 강곡리(속칭 강바데)가 그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립니다. 곧 '삼한대처 김천고을 황악산 밑'은 김천과 우리 모교의 터전입니다. 전국의 많은 학교들을 돌아 보건대 중·고교의 학교 부지로서 이만한 천혜의 자연과 입지적 조건을 갖춘 학교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송설인들은 학교 부지의 광활함과 풍광의 수려함에 큰 긍지를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제1절의 끝 부분 '큰 이상에 새로운 일 현실이 주장'이란 부분은 의미의 함축성이 매우 두드러진 곳입니다. 이곳에서의 '주장'(主張)이란 주요하게 여겨 내세움이란 뜻으로, 굳이 이 구절을 풀이하자면 '큰 이상을 향해 새로운 일을 펼쳐 나아가자면, 진리 탐구와 자기 수양의 현실에 충실해야…', 곧 '현실을 주요히 내세우자, 너무 이상에만 들떠 현실을 등한시하지는 말지어다'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들이 맘과 몸으로 키워 가는 포부란, 큰 이상(理想)의 실현을 위해 현실을 중요히 여겨 내세우는 일'이란 뜻이겠지요.
제2절 가사를 보십시다. 우리 나라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우리 교가도 국적을 잃고 일본어로 표기되는 수난을 겪었더군요. 송설 70년의 역사와 관련 문헌과 기록들을 살펴보면, 지금의 교가는 1937년부터 일제의 일본어 사용 강요 정책에 의하여 일본어 가사로 개사(공립 김천중학교 시절)되어, 국적을 잃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랬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원래의 한글 가사로 복원되었는데, 이 때에 제2절의 제3구 '굳세거라 김천고보'를 '굳세거라 송설학원'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제2절에서 '아름다운 마음의 씨 가신 배 없다'의 '가시다'는 '변한 바, 사라진 바가 없다'는 말로, 이곳은 아름다운 우리 토막이말이 어우러진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가시다'란 말은 고려 말의 유신(儒臣) 정몽주의 시조에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곧, 아름다운 우리 마음의 씨는 변한 바가 전혀 없다는 의미의 표현이겠지요. '즈믄 선도들'의 '선도'는 '仙徒'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은 '수 많은, 신선이 되고자 마음을 닦는 무리들'이란 의미로 보입니다.
현존 가장 오래된 교가 가사 여느 교가와 달리 우리 교가는 3절까지 이어지고 있어, 그 의미의 심장함과 장중함이 돋보입니다. 가사 전체를 두고 볼 때 이 제3절에 한국어 어휘의 정감과 아름다움이 가장 잘 용해돼 있어, 노래의 아름다움과 심오함 그리고 운율미를 더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3절 가사는 그 동안 전수되면서 몇 군데 표기가 달리 나타나는 혼란상을 보이고 있답니다. 각종 문헌과 자료들에 서로 달리 표기되는 곳이 있어 걱정스럽습니다. '저것봐라 낙락장송'의 '저것보라'와 '늘이 푸르름'의 '너리' 그리고 '학우들은 갈마들어도'의 '갈아들다' 같은 곳이 그러합니다.
송설 70년 역사의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송설 50년사」(1981. 5)에는 이 세 단어의 표기가 각각 '저것봐라' '늘이' '갊아들어도'로 나와 있으며, 「송설 60년사」(1991.12)에는 각각 '저것봐라' '늘이' '갈아들어도'로 나와 있군요. 그러나 이보다 간행 연대가 훨씬 앞선 교우지 - 「송설」제6호(1961.12), 제11호(1970.1) - 에 보면 이 단어들이 각각 '저것봐라' '너리' '갈마들어도'로 표기돼 있답니다.
먼저, '저것 봐라'는 '저것 보라'로 표기된 곳이 여러 곳 있는데 이 곳은 교가의 역사상으로나 어감상으로 보아 '저것 봐라'라 바른 표기입니다. '느리 푸르름'의 '느리'는 그 동안 '너리' 또는 '늘이'로도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우리 교가 가사 표기에 의문성이 가장 심한 곳으로 보입니다. 현재 모교에서 송설 제1회 졸업생(1935년 3월 졸업) 앨범의 교가 가사를 발견,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정 당시와 불과 3년 차이가 나는, 현재로서는 원본에 가장 가까운 교가가 가사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의하면 이 곳은 '느리'로 표기되어 있군요. 그런데 국어 어휘에는 '넓게'라는 의미로는 '널리'라는 말이 있으며, '늘·언제나'란 뜻의 '늘이'라는 고유어 부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 동안 각종 문헌엔 '너리'가 오래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는데, 현대 국어 표기법에 맞춰 쓰자면 '늘이'로 써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들며나며'는 '들어오고 나가며'이겠는데, '갈아 들어도'도 표기를 바로잡아야 할 곳입니다. 원래 '갈마들다'라는 말은 '서로 번갈아들다'란 뜻의 아름다운 우리 고유어인데, 위 송설 제1회 졸업 당시의 가사 표기에는 '갊아들다'로 예스런 표기되어 있군요. 이것을 '갈아 들다'로 표기하고 있는 곳도 많았습니다. 현재로서는 사전에 보면 '갊다'란 '감추다' '저장하다' '염습하다'라는 뜻의 전혀 다른 단어이니, 이것은 '갈마들다'로 현대어화 하여 씀이 옳습니다. 현행 국어에 '갊아들다'라는 단어는 없으니까요. 요컨대, 위 구절들의 세 단어는 국어 어휘 변천상, 가사의 어감상 그리고 현행 국어 표기법상으로 보아 각각 '저것 봐라' '늘이' '갈마들어도'로 표기하는 것이 우리 교가의 올곧은 표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사할손 맘의 고향'에서 '다사하다'는 '따사하다'보다 여린 말로서 '다사할 것은'의 뜻. '다사할 것은 맘의 고향인 우리의 모교'라는 표현이랍니다. 제3절의 마지막 구절 '한 가지로 맘에 새길 이상의 보람'이란 굳이 풀이하자면 '우리가 한 가지로 마음에 새겨 나아갈 것은 이상 실현의 보람'이란 뜻이겠지요. 결국, 우리 교가에 담긴 대의는 "희망의 송설 학원은 대한의 자랑이며, 청송의 모교는 길이 이상 구현의 현장이라는 것. 곧 그 교육의 목표를 이상의 실현에 두고 있음"이라고 송설의 역사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정 당시의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는 송설 제1회 졸업 당시의 교가 가사가 발견, 확인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를 모교의 선생님(교사 이종복)이 재촬영하여 지금 동창회 홈페이지에 탑재해 놓고 있는 바, 총동창회 홈페이지의 <송설 70년 사진 자료실> → <송설 역사 사진전(1930년대)>에 소개하고 있는 1930년대 중반 당시의 교가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설 제1회 졸업(1935. 3) 당시의 교가 가사
三韓大處 金泉고을 黃岳山 밑에 來歷깊고 자랑많은 無窮花 동산 저것봐라 落落長松 느리 푸르름
보는 바와 같이, 가사의 표기가 현재의 가사 표기와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8·15 광복을 맞아 제2절의 '김천고보'는 '송설 학원'으로 수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되, 그 외의 부분은 보완없이 시대와 문헌에 따라 몇 군데가 표기상 혼란이 있어왔던 것입니다. 표기를 통일하거나 현행 맞춤법에 맞게 다듬어 써야할 것으로 보이는 곳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사 표기를 통일해야 할 곳 <1935년> <현재> 큰 이상 큰 이상에 느리 너리, 늘이 갊아들어도 갈마들어도, 갈아들어도 맘에 새길 맘에 새긴
그러고 보니, 올해는 교가 탄생 70주년의 해가 되는군요. 그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교가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하고, 바르게 전수해 가야할 것입니다. 2만여 송설인들의 노래인 교가 의 표기에 통일성을 상실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교가 제정 당시의 가사 정본이 있다면 그 표기대로 따르면 되겠으되, 정본이 없음에서 이런 표기상의 혼란이 유발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현행 맞춤법에 맞게 다듬어 써야 할 곳은 이를 심의하여 바로잡아 써야 할 것입니다. 이즈음 <송설 역사관> 건립을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기회에 여러 사료(史料)와 함께 교가의 정본도 비치해야 할 것입니다. 교가의 온전한 보전, 올곧은 송설 학풍의 확립을 위하여 학교 당국과 많은 동문들의 관심과 이해가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송설 정신의 무궁한 전수와 바르고 아름답게 우리 국어 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도 말입니다.
<참고 문헌> 한글학회 홈페이지(http://www.hangeul.or.kr) 송설총동창회에 게시된 송설1회(중1회) 졸업앨범의 교가( http://songsol.or.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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