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동창

용사일기 번역한 도두호님(송설38)과 진영 그린 김현철화백(송설41)

보리숭이 2016. 4. 27. 19:10

용사일기는 송설38회 고 도두호(새박 대표)동문이 생전인 2009년 1월 용사일기를 완역한 것이다.

용사일기 표지를 그렸던 송설41회 금릉 김현철화백이 고 도두호 동문의 진영을 그려 발표했다. 이에 2009년 2월 월간조선 3월에 소개되었던 용사일기의 내용과 고 도두호 동문의 진영과 김현철화백의 진영을 그리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고 도두호 동문은 최송설당 기념사업 추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송설역사관 설립 당시 최송설당 진영 마련에 도움을 많이 주었던 동문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18세 청년이 자신의 艱難辛苦(간난신고)를 생생하게 기록한 <龍蛇(용사)난중일기>를 후손이 한글로 번역, 공개했다고 월간조선 3월호가 보도했다.

星州(성주) 都(도)씨 14세손인 都世純(도세순·1574~1653)이란 젊은이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3일부터 1595년 1월 15일까지 피란지에서 한문으로 쓴 총 40쪽(목판본 기준) 분량의 일기다.


도세순이 쓴 ‘용사난중일기’는 경북 성주의 도씨 가문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던 기록으로, 최근 후손이 번역해 공개했다. 일기의 제목은 1592년 전란이 시작된 壬辰(임진)년과 이듬해인 1593년 癸巳(계사)년의 2년, 즉 ‘용(龍)과 뱀(蛇) 해의 일기’라는 뜻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세순과 그의 일가 친척 40여 명은 고향인 경북 성주군 운정리 개터마을을 떠나 인근의 여러 산속에 숨어 지냈고, 이어 경북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문예촌, 합천군 율곡면 두사리, 군위군 의흥면 등을 전전하며 파란만장한 피란생활을 했다.

일기에는 왜적의 살육을 피해 젊은 사람들은 멀리 도망가라는 부모의 눈물 어린 조언, 온 가족이 饑餓(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모습, 戰時(전시)에 극도로 간소하게 치러야 했던 冠禮(관례: 성인식), 어린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등 평범한 청년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초기에는 왜적의 살육과 추격으로 공포에 질려 피해 다니는 모습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1년여가 지난 후에는 식량이 부족해 노비들이 굶어 죽고 도처에서 굶거나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늘어나는 모습이 펼쳐진다. 노비를 데려가기도 했지만 식량이 모자라 버리고 가기도 했고, 산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 먹었지만 그것조차 모자라 가족들은 피골이 상접했고, 어린 동생은 오랜 굶주림 끝에 우연히 얻은 보리밥을 급히 먹다가 목이 메어 죽기도 했다.
  

           

<용사일기> 원문
다음은 일기의 주요 내용이다.

⊙ 흉악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다. 대낮에도 어두워서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다.(1592년 4월 28일)
⊙ 배득창이 와서 말하기를, “왜적이 사람을 죽이는 참상이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자네처럼 젊은 사람은 반드시 목이 잘릴 것이야.”(1592년 4월 30일)
⊙ 신흥후산 사방에서 왜적이 구름처럼 모여 성에 불을 질렀다. 겁탈이 더욱 심하고, 살육이 더욱 참혹하였다. 인민들은 이고 지고 부축하고 껴안고 하여 피란을 나섰다.(1592년 5월 26일)
⊙ 운곡에 이르니 형님과 누이는 굶주린 기색이 가득하다. 노복들은 이미 굶어서 죽었다. 외롭고 옹색한 참상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1594년 3월 18일)
⊙ 밭이랑에서 이삭을 주워서 죽을 끓여 끼니를 이었다.(1594년 3월 25일)
⊙ 동생 복일의 목숨이 목구멍에 걸려 있다. 처음 보리밥을 먹고 숨이 막혔다는 것이다. 동생은 영원히 떠나 버렸다.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1594년 6월 22일)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고 도두호 진영(금릉 김현철 그림)


얼마 전, 도두호 선배의 4주기 기일에 맞춰 그간 준비해 온 초상화를 제작해 영전에 드렸습니다.
생전 저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이렇듯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의 초상화를 살펴보니 생전에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그 능력이나 삶이 그릴만 하기에 초상을 제작했을터이고, 생후 후손 또는 후학들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는 그 성품과 업적이 후세에 널리 기릴만했기에 그려졌더군요.
그런 점에 비추니 도두호 형은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난 아쉬움은 있으나 인생을 잘 사시다 가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모쪼록 생전 그를 기억하는 송설인들이 이 초상화를 통해 잠시나마 그를 추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초상그림을 보내드립니다.

금릉 김현철 드림


초상화 제작중 방문한 도두호님의 누이 동생, 형수님, 정산스님(송설41)